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통일 신라와 발해사회신라 말 농민들의 봉기

초적의 발생

[원성왕 4년(788)] 가을에 나라 서쪽에 가뭄과 누리가 있고 도적이 많이 일어났으므로, 왕이 사신을 보내어 위로하고 안정시켰다.

삼국사기』권10, 「신라본기」10 원성왕 4년 추

[헌덕왕 11년(819)] 3월에 초적(草賊)이 사방에서 일어났으므로, 여러 주(州)와 군(郡)의 도독(都督)과 태수에게 명하여 붙잡게 하였다.

삼국사기』권10, 「신라본기」10 헌덕왕 11년 3월

秋, 國西, 旱蝗, 多盜賊, 王發使安撫之

『三國史記』卷10, 「新羅本紀」10 元聖王 4年 秋

三月, 草賊遍起, 命諸州郡都督太守, 捕捉之

『三國史記』卷10, 「新羅本紀」10 憲德王 11年 3月

이 사료는 신라 하대로 들어와 계속되는 중앙 정치의 불안과 자연재해 등으로 민심이 동요하면서 초적(草賊)이 발생하게 된 상황을 전한다. ‘초적’이라는 말은 『삼국사기』 헌덕왕(憲德王) 11년(819) 3월조 기사에 처음 등장한다.

신라 중대 말에 이르면 중앙 귀족들의 권력 다툼으로 인한 정치 세력의 분열과 지배층의 사치와 방탕으로 재정이 고갈되면서 국가 전반에 걸쳐 위기가 계속됐다. 더구나 하대에 들어서면서 잦은 왕위 쟁탈전과 이와 관련한 반란으로 신라의 왕경뿐만 아니라 전국이 혼란과 위험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싸움에서 실패한 정치 세력이 지방으로 물러나 거주하는 사례도 늘어 갔다.

여기에 가뭄과 홍수 등 계속된 자연재해로 기근이 자주 발생하고 전염병까지 유행하면서 백성들의 생활은 더욱 어렵게 되어 갔지만 조정은 속수무책이었다. 농업 생산량은 극도로 감소되었지만 향락과 사치에 빠진 중앙 정부와 지배층은 조세를 더욱 독촉하였다. 그 결과 이를 견디지 못하고 조세를 거부하거나 다른 지역으로 유망하는 백성이 늘어 갔다. 그리고 이들은 점차 소극적인 유망민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농민 반란군, 즉 초적으로 변해 난을 일으켰다.

유망민은 대부분 농민으로서, 초기에 그들은 원래 살던 곳에서 도망하여 먹고 살기 위해서 이곳저곳을 떠돌아 다녔다. 그러나 생활은 계속 악화되어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거나 굶어죽는 자가 속출하였고, 경제적인 곤궁을 이기지 못하고 승려나 상인으로 직업을 바꾸어 생계를 꾸려 나가거나, 재력을 가진 자에게 몸을 팔아 노비가 되는 경우도 발생하였다.

또한 산 속이나 섬으로 들어간 유망민도 있었는데, 이들은 도적⋅초적이 되어 공동 집단생활을 하면서 점차 규모를 키워 나갔다. 이들은 무장을 하고 마치 중국의 황건적(黃巾賊)처럼 복장을 특이하게 하는 방법 등으로 스스로를 다른 무리와 구분하며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예컨대 진성여왕(眞聖女王, 재위 887~897) 대에 ‘붉은 바지를 입은 무리’라는 의미의 ‘적고적(赤袴賊)’이 있었는데, 이들은 동쪽으로 진격하여 신라의 수도인 경주 서남 방면까지 진격할 정도로 기세를 보였다. 이들 초적이 된 유망민은 다른 농민 반란군에 흡수되거나, 보다 크고 강력한 집단에 편입되어 그 집단의 군사적 세력 기반이 되어 갔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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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말 농민반란의 배경에 대한 일시론」,『한국고대사연구』7,조인성,한국고대사학회,1994.
「나말 선사들과 사회제세력과의 관계-진덕여왕대의 농민반란에 주목하여-」,『사총』30,추만호,고려대학교 사학회,1986.
저서
『태봉의 궁예정권 연구』, 조인성, 푸른역사, 2007.
『고려시대의 국가와 지방사회』, 채웅석,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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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
「신라 하대사회의 동요」, 최병헌, 국사편찬위원회 편, 1976.

관련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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