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통일 신라와 발해사회신라 말 농민들의 봉기

원종과 애노의 봉기

[진성왕] 3년(889) 나라 안의 여러 주(州)⋅군(郡)에서 공물과 조세를 보내지 않아 나라의 창고가 텅 비어 나라의 씀씀이가 궁핍하게 되었으므로 왕이 사자를 보내 독촉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도적들이 곳곳에서 벌떼처럼 일어났다. 이에 원종(元宗)과 애노(哀奴) 등이 사벌주(沙伐州)를 근거지로 반란을 일으키자 왕이 나마(奈麻) 영기(令奇)에게 명하여 (이들을) 붙잡아 오도록 하였다. 영기가 적의 보루를 멀리서 바라보고는 두려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였으나 촌주(村主) 우련(祐連)은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왕이 칙명을 내려 영기의 목을 베고 나이 10여 세 된 우련의 아들에게 촌주의 직을 잇게 하였다.

삼국사기』권11, 「신라본기」11 진성왕 3년

[眞聖王] 三年, 國內諸州郡不輸貢賦, 府庫虛竭, 國用窮乏, 王發使督促. 由是所在盜賊蜂起. 於是元宗⋅哀奴等㩀沙伐州叛, 王命奈麻令竒捕捉. 令竒望賊壘, 畏不能進, 村主祐連力戰死之. 王下勑斬令竒, 祐連子年十餘歲, 嗣爲村主.

『三國史記』卷11, 「新羅本紀」11 眞聖王 3年

이 사료는 889년(진성여왕 3년) 신라의 사벌주(沙伐州, 경상북도 상주)에서 일어난 원종(元宗)과 애노(哀奴)의 난에 대한 기록이다. 원종과 애노의 난은 신라의 멸망을 예고하는 농민 봉기라고 할 수 있는데, 이를 계기로 각지에서 반란이 계속되어 결국 신라가 해체되면서 후삼국으로 분열되었다.

중대의 전성기를 지나 하대로 접어들면서 신라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진골 귀족 간의 잦은 분쟁으로 중앙 정부의 지방 통제력이 점차 약화되어 갔다. 여기에 귀족 및 사원의 토지 겸병 확대로 일반 농민은 점차 토지로부터 유리되어 갔으며, 잦은 기근으로 말미암아 유망하거나 초적(草賊)이 되는 백성의 수도 늘어 갔다. 결과적으로 국가 경제의 기반인 농민층이 분해된 반면, 사치와 향락 풍조로 중앙 정부의 재정 수요는 계속 늘어 갔다. 이와 같은 정치⋅사회적 모순은 진성여왕 대에 극도에 달하여, 중앙 정부에 저항하는 농민들의 봉기가 연이어 일어나게 되었다. 그 시작이 된 것이 바로 원종과 애노의 반란이다.

원종과 애노의 반란은 889년(진성여왕 3년)에 있었던 조세의 독촉이 직접적인 발단이 되었다. 국고가 비고 재정이 궁핍하게 되자 중앙 정부는 관리를 파견해 조세를 독촉하였다. 이러한 조세 부담은 피지배층인 일반 농민에게 그대로 전가되었다. 그러나 이미 지배층의 수탈과 기근 등으로 생활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농민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중앙 정부에 대항하여 일어났다.

원종과 애노의 난이 일어난 상주 지역은 삼국 시대부터 신라의 영역이었던 곳으로, 토지가 기름지고 수리 시설도 잘 구비되어 물산이 풍부한 곳이었다. 그럼에도 이 지역에서 농민들의 불만이 팽배하여 최초의 농민 반란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경주와 가까운 이 지역에 대한 신라 정부와 귀족들의 침탈이 극심하였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또한 이곳은 김헌창(金憲昌, ?~822)이 난을 일으켰을 때에도 동조한 것으로 보아, 지배층의 수탈로 인해 중앙 정부에 대한 반감이 오래 전부터 발생했었음을 알 수 있다.

반란이 일어나자 중앙 정부는 난을 진압하고자 나마(奈麻) 영기(令奇, ?~889)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영기는 두려워 앞으로 나가지도 못하였고, 도리어 촌주(村主)인 우련(祐連, ?~889)이 힘껏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이와 같이 중앙에서 군대를 파견하였음에도 제압하지 못하고 촌주가 전사하기까지 한 것으로 보아 당시 반란 세력이 상당한 규모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원종과 애노의 반란이 성공하였는지, 중앙군에 의해서 진압되었는지는 기록에 나타나지 않아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들의 봉기에 자극을 받은 지방 세력들이 각지에서 연이어 반란을 일으키면서 전국은 전장으로 변해 갔다. 북원(北原, 강원도 원주)의 양길(梁吉), 양길의 부하가 된 궁예(弓裔, ?~918), 죽주(竹州, 경기도 안성시 죽산)의 기훤(箕萱), 완산(完山, 전라남도 전주)의 견훤(甄萱, 867~936) 세력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결국 중앙 정부의 조세 징수에 저항하며 일어난 최초의 농민 봉기인 원종과 애노의 난은 지방 호족 세력의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며, 신라가 쇠퇴하고 후삼국 시대가 열리는 단초가 되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신라⋅고려의 왕조교체와 군현제의 변화」,『신라말 고려초의 정치사회변동』,김갑동,한국고대사연구회 편, 신서원,1994.
「후삼국시기의 지배세력의 성격에 대하여」,『이상백박사회갑기념논총』,김철준,간행위원회 편, 을유문화사,1964.
「9세기 신라사 이해의 기본과제-왜 신라는 농민반란의 일격으로 쓰러졌는가?-」,『신라문화』26,이기동,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2005.
「나말여초 사회변동과 후삼국」,『한국중세사연구』29,이인재,한국중세사학회,2010.
「신라하대 농민들의 특징」,『International Journal of Korean History』1,이정신,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2000.
「신라말 농민반란의 배경에 대한 일시론」,『한국고대사연구』7,조인성,한국고대사학회,1994.
저서
『신라하대 정치사 연구』, 권영오, 혜안, 2011.
『신라의 멸망과 경문왕가』, 전기웅, 혜안, 2010.
『태봉의 궁예정권』, 조인성, 푸른역사, 2007.
편저
「신라 하대의 농민항쟁」, 전덕재, 한길사, 1994.

관련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링크연결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