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사(聖師) 원효(元曉)의 속성(俗姓)은 설씨(薛氏)이다. 할아버지는 잉피공(仍皮公)으로 또는 적대공(赤大公)이라고도 하는데, 지금 적대연(赤大淵) 옆에 잉피공의 사당이 있다. 아버지는 담날(談捺) 내말(乃末)이다. 처음에 압량군(押梁郡)의 남쪽
【지금의 장산군(章山郡)이다】
불지촌(佛地村) 북쪽 율곡(栗谷) 사라수(娑羅樹) 아래서 태어났다. ……(중략)……
성사가 태어나서 어릴 적 이름은 서당(誓幢)이고, 제명(第名)은 신당(新幢)
【당(幢)은 속어로 털[毛]이다】
이다. 처음에 어머니가 유성(流星)이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태기가 있었는데, 해산하려고 할 때는 오색구름이 땅을 덮었다. 이때가 진평왕(眞平王)
39년인 대업(大業) 13년 정축년(丁丑年, 617)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총명이 남달라 스승을 따라서 배우지 않았다. 그가 사방으로 다니며 수행한 전말과 널리 교화를 펼쳤던 크나큰 업적은 『당전(唐傳)』과 행장(行狀)에 자세히 실려 있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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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가 이미 계율을 잃어버려 설총(薛聰)
을 낳은 이후 속인의 옷으로 바꾸어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라고 하였다. 우연히 광대들이 놀리는 큰 박을 얻었는데 그 모양이 괴이하였다. 그 모양대로 도구를 만들어 『화엄경(華嚴經)』의 “일체 무애인(無㝵人)은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난다.”라는 (문구에서) 이름을 ‘무애(無㝵)’라고 하고 이에 노래를 지어 세상에 퍼뜨렸다. 일찍이 이것을 가지고 온 마을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고 음영하여 돌아오니 가난하고 무지몽매한 무리까지도 모두 부처의 호를 알게 되었고, 모두 나무[南無]를 칭하게 되었으니, 원효의 법화(法化)가 컸던 것이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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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분황사(芬皇寺)에 살면서 『화엄경소(華嚴經疏)』를 짓다가 「제사십회향품(第四十廻向品)」에 이르자 마침내 붓을 놓았다. 또 일찍이 소송으로 인해서 몸을 백 그루의 소나무로 나누었으므로 모두 (그의) 위계(位階)를 초지(初地)라고 하였다. 또 해룡(海龍)의 권유에 따라 길에서 조서를 받아 『삼매경소(三昧經疏)』를 지으면서 붓과 벼루를 소의 두 뿔 위에 놓아 두었으므로 이를 각승(角乘)이라고 했는데, 또한 본각과 시각 두각[本始二覺]의 숨은 뜻을 나타낸 것이다. 대안법사(大安法師)가 배열하여 종이를 붙인 것은 음을 알고 화창(和唱)한 것이다.
『삼국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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