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통일 신라와 발해문화교종의 전개

의상의 전기와 화엄일승법계도

법사(法師) 의상(義湘)은 아버지가 한신(韓信)으로 김씨(金氏)인데, 나이 29세에 경주 황복사(皇福寺)에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얼마 있지 않아 서방으로 가서 불교의 교화를 보고자 하였다. 드디어 원효(元曉)와 함께 요동으로 갔다가 변방의 순라군(戌邏軍)에게 첩자로 오인 받아 수십 일 동안 갇혔다가 간신히 면하여 돌아왔다【이 사실은 최후(崔侯)가 지은 본전(本傳)과 원효의 행장(行狀) 등에 실려 있다】. 영휘(永徽) 초에 마침 당나라 사신의 배가 서방으로 돌아가려고 하자 편승하여 중국으로 들어갔다. ……(중략)……

종남산(終南山) (지엄(智儼)의) 문인 현수(賢首)가 『수현소(搜玄疏)』를 찬술하여 의상에게 부본(副本)을 보내면서, 아울러 편지를 보내 은근하고 간절하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서경(西京) 숭복사(崇福寺)의 중 법장(法藏)은 해동(海東) 신라 화엄법사(華嚴法師)의 시자(侍者)에게 글을 보냅니다. 한번 작별한 지 20여 년에 사모하는 정성이 어찌 마음에서 떠나겠는가마는, 구름이 자욱한 만리 길에 바다와 육지가 천 겹으로 (막혀) 이 한 몸이 다시 만나 뵐 수 없음이 한스럽습니다. 그리운 회포를 어찌 가히 말로써 다 할 수 있겠습니까? 전생의 같은 인연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 학업을 같이하였으므로, 이 과보(果報)를 얻어 함께 대경(大經)에 목욕하고 특별히 돌아가신 스승으로부터 이 심오한 경전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우러러 듣건대 상인(上人)께서는 귀국 후에 화엄(華嚴)을 강의하고, 법계(法界)의 무진연기(無盡緣起)를 선양하며 겹겹의 제망(帝網)으로 불국(佛國)을 더욱 새롭게 하여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한다고 하니 기쁨이 더욱 커집니다. 이로써 석가여래가 돌아가신 후에 불일(佛日)을 밝게 빛내고 법륜(法輪)이 다시 구르게 하여 불법을 오랫동안 머물게 할 이는 오직 법사뿐입니다.

법장은 매진하였으나 이룬 것이 없고, 활동하였으나 볼 만한 것이 적어 우러러 이 경전을 생각하니 돌아가신 스승에게 부끄럽습니다. 분수에 따라 받은 것은 능히 버릴 수 없으므로 이 업에 의지하여 내세의 인연을 맺기를 희망합니다. 다만 화상(和尙)의 장소(章疏)가 뜻은 풍부하지만 문장은 간략하여 후인으로 하여금 뜻을 알게 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으므로 화상의 은밀한 말과 오묘한 뜻을 적어 의기(義記)를 애써 완성하였습니다.

근래에 승전법사(勝詮法師)가 베껴서 고향에 돌아가 그 땅에 전하고자 하니, 청컨대 상인께서는 옳고 그른 것을 상세히 검토하여 가르쳐 주시면 다행이옵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마땅히 내세에는 이 몸을 버리고 새 몸을 받음에 서로 함께 노사나불(盧舍那佛) 앞에서 이와 같은 무진(無盡)한 묘법(妙法)을 받고 무량(無量)한 보현(普賢)의 원행(願行)을 수행한다면 나머지 악업(惡業)은 하루아침에 굴러 떨어질 겁니다. 바라건대 상인께서는 옛 일을 잊지 마시고 어느 업의 세계에 있든지 간에 바른 길을 보이시고, 인편과 서신이 있을 때마다 생사를 물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이] 글은 대문류(大文類)에 실려 있다】.

의상은 이에 열 곳의 절에 교(敎)를 전하게 하니 태백산(太伯山)의 부석사, 원주(原州)의 비마라(毗摩羅)사, 가야산의 해인사, 비슬산의 옥천사, 금정산의 범어사, 남악의 화엄사 등이 그것이다. 또 『범계도서인(法界圖書印)』을 저술하고 아울러 간략한 주석을 붙여 일승(一乘)의 요긴한 알맹이(樞要)를 모두 포괄하였으니 1000년을 두고 볼 귀감이 되어 저마다 다투어 보배로 여겨 지니고자 하였다. 나머지는 찬술한 것이 없으나 한 점의 고기로 온 솥의 국물 맛을 알 수 있다. 「법계도」는 총장(總章) 원년 무진(戊辰, 668)에 이루어졌다. 이 해에 지엄도 입적하였으니, 공자(孔氏)가 기린을 잡았다는 [구절]에서 붓을 놓은 것과 같다. 세상에 전하기를 의상은 금산보개(金山寶蓋)의 화신이라고 하였다.

삼국유사』권4, 「의해」5 의상전교

法師義湘, 考曰韓信, 金氏, 年二十九依亰師皇福寺落髮. 未㡬, 西啚觀化. 遂與元曉道出遼東, 邉戍邏之爲諜者, 囚閉者累旬, 僅免而遝【事在崔侯夲傳, 及曉師行状䓁.】. 永徽初, 會唐使舡有西還者, 寓載入中國. ……(中略)……

終南門人賢首撰搜玄䟽, 送副本於湘處, 并奉書懃懇曰. 西亰崇福寺僧法藏, 致書於海東新羅華嚴法師侍者. 一従分别二十餘年, 傾望之誠, 豈離心首, 加以烟雲萬里, 海陸千重, 恨此一身不復再靣. 抱懷戀戀, 夫何可言. 故由夙世同因, 今生同業, 得於此報, 俱沐大経, 特蒙先師授兹粵典.

仰承上人歸郷之後, 開演華嚴, 宣揚法界無㝵縁起, 重重帝網, 新新佛國, 利益弘廣, 喜躍增深. 是知如来滅後, 光輝佛日, 再轉法輪, 令法久住者, 其唯法師矣.

藏進趣無成, 周旋寡况, 仰念兹典, 愧荷先師. 隨分受持, 不能捨離, 希憑此業, 用結来因. 但以和尚章疏, 義豊文簡, 致令後人多難趣入, 是以録和尚微言妙旨, 勒成義記.

近因勝詮法師抄冩還郷, 傳之彼圡, 請上人詳撿臧否, 幸示箴誨. 伏願當當来世, 捨身受身, 相與同於廬舍那, 聽受如此無盡妙法, 修行如此無量普賢願行, 儻餘惡業, 一朝顛墜. 伏希上人不遺宿昔, 在諸趣中, 示以正道, 人信之次, 時訪存没. 不具【文載大文類.】.

湘乃令十刹傳敎, 太伯山浮石寺, 原州毗摩羅, 伽耶之海印, 毗瑟之玉泉, 金井之梵魚, 南嶽華嚴寺䓁, 是也. 又著法界啚書印并略䟽, 括盡一乗樞要, 千載龜鏡, 竸所珎佩. 餘無撰述, 嘗鼎味一臠足矣. 啚成緫章元年戊辰. 是年儼亦帰寂, 如孔氏之絶筆於獲麟矣. 世傳湘乃金山寳蓋之幻有也.

『三國遺事』卷4, 「義解」5 義湘傳敎

이 사료는 신라 10성(十聖)의 한 명으로, 당나라에 건너가 화엄학(華嚴學)을 공부하고 귀국하여 우리나라 화엄종의 창시자가 된 의상(義湘, 625~702)의 행적을 전하고 있다.

의상은 속성이 김(金)씨로 아버지는 한신(韓信)이며, 진골 귀족 출신이다. 그는 원효(元曉, 617~686)와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가 요동에서 고구려 군사에게 잡혀 신라로 되돌아왔으며, 다시 10년 뒤에 원효와 함께 유학을 떠났다가 홀로 당나라에 들어갔다. 그는 당나라에서 중국 화엄종의 제2조인 지엄(智儼, 602~668)에게 화엄학을 배웠으며, 함께 수학한 당나라 승려 법장(法藏, 643~712)의 존경을 받았다. 그 뒤 귀국하여 낙산사와 부석사를 세우고, 오진(悟眞)⋅지통(知通)⋅표훈(表訓)⋅진정(眞定)⋅진장(眞藏)⋅도융(道融)⋅양원(良圓)⋅상원(相源)⋅능인(能仁)⋅의적(義寂) 등 10대 제자를 두었다.

의상이 화엄종을 전래하기 이전에 이미 신라에는 『화엄경(華嚴經)』이 소개되어 있었다. 기록으로 볼 때 신라 최초의 화엄 사상가는 자장(慈藏, 590~658)이다. 하지만 의상이 화엄종의 종조(宗祖)라 불리는 이유는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를 중심으로 화엄 사상을 강의하면서 조직화된 화엄 교학의 체계를 전수했기 때문이다.

의상은 원효와 달리 많은 저술을 남기지 않았다. 현재 전하는 몇 가지 저술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화엄일승법계도」와 「백화도량발원문(白華道場發願文)」 등이다. 「화엄일승법계도」는 7언(言) 30구(句)의 게송(偈頌)으로, 화엄의 중심 논리인 법계연기(法界緣起)를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에서 시작하여 ‘본래부동명위불(本來不動名爲佛)’로 끝마치면서 그려 놓았다. 특히 첫 글자인 ‘법(法)’과 끝 글자인 ‘불(佛)’ 두 글자가 중앙에 있는데, 이것은 수행 방편의 원인과 결과를 나타낸 것으로, 의상이 인과(因果)의 본성을 중도(中道)라고 강조한 중도실상(中道實相)의 의미를 담고 있다. 한편 「백화도량발원문」은 낙산사와 관련지어 지은 것으로, 관음불(觀音佛)에 대한 예찬을 강조한 의상 실천 신앙의 특징을 보여 준다.

의상의 화엄 사상과 관음 신앙은 그 뒤 많은 승려가 주목해서, 신라 하대에는 「화엄일승법계도」에 관한 주석서인 『법융기(法融記)』, 『대기(大記)』, 『진수기(眞秀記)』 등이 편찬되었고, 고려 초 균여(均如, 923~973)와 조선 전기의 김시습(金時習, 1435~1493)도 「화엄일승법계도」에 관한 저술을 남겼다.

의상의 저술에 대한 꾸준한 이해가 뒷받침되면서 신라 중대 이래 의상계 화엄종은 성행하였다. 10세기 초 최치원(崔致遠, 857~?)이 부석사를 비롯해 원주의 비마라사(毘摩羅寺), 가야산의 해인사, 비슬산의 옥천사, 금정산의 범어사, 지리산의 화엄사 등 화엄십찰(華嚴十刹)을 거론하였는데, 이들 사찰은 모두 의상계 화엄종 승려가 주석하던 곳이다.

의상의 화엄 사상은 융섭적인 경향을 띠었다. 그는 “하나가 곧 일체(一切)이며, 한 작은 티끌 속에 시방(十方)이 있는 것이요, 한 찰나가 곧 영원이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양은 셀 수 없지만 실은 하나이며, 공간은 가늠할 없지만 한 작은 티끌 속에 포함되어 있으며, 시간이 영원한 듯하지만 영원한 것도 한 찰나”라는 의미이다. 이처럼 의상은 일심(一心)에 의하여 우주의 삼라만상을 통섭(統攝)하려고 하였다.

의상의 융섭적인 화엄 사상과 관련해, 그것이 신라 중대 왕실이 위엄을 내세우면서 국가를 운영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는 견해가 있다. 곧 신라 영역에 속하는 모든 이는 그 차별적인 모습을 굳이 드러낼 필요 없이 왕실의 교화를 받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대 왕실은 물론 하대 왕실에서도 의상의 화엄 사상을 강조하면서 왕권의 전제화를 추구하였다. 반면 의상의 화엄 사상과 전제 왕권을 직결시켜 이해하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며, 역사적 사실과도 일치하지 않는다는 비판적인 견해도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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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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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화엄사상사연구』, 전해주, 민족사, 1993.
『의상 화엄사상 연구』, 정병삼,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8.
편저
『의상의 사상과 신앙연구』, 의상기념관 편, 불교시대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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