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려 혜숙(惠宿)은 (화랑) 호세랑(好世郞)의 무리 속에 섞여 지냈는데, 호세랑이 이미 화랑 명부[黃卷]에서 이름을 면하게 되자 스님도 또한 적선촌(赤善村)
지금의 안강현(安康縣)에 적곡촌(赤谷村)이 있다
에 숨어 지낸 지가 20여 년이 되었다.……(중략)……
진평왕
이 이를 듣고 사자(使者)를 보내 맞아 오게 하였더니, 혜숙이 여자의 침상에 누워 자는 척 하였다. 중사(中使)가 (이를) 더럽게 여겨 7~8리쯤 되돌아오다가 중도에서 혜숙을 만났다. (사자가) “어디에서 오십니까?”라고 물으니 (혜숙이) “성(城) 안 시주집[檀越家]의 7일재(齋)에 갔다가 법석을 파하고 돌아온다.”라고 하였다. 중사가 그 말을 왕에게 아뢰니, (왕이) 또 사람을 보내 그 시주 집을 조사해 본 결과 그 일도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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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 혜숙이 갑자기 죽으니 마을 사람이 이현(耳峴)
혹은 형현(硎峴)이라고도 한다
동쪽에 장사 지냈다. 그 마을 사람으로서 이현 서쪽에서 오던 사람이 길에서 혜숙을 만나 “어디로 갑니까?”라고 물었더니, (혜숙이) 말하기를 “이곳에 오래 살았기에 다른 곳으로 가 보려고 한다”라고 하였다. 서로 인사를 하고 헤어졌는데, 반리 가량 가다가 구름을 타고 가 버렸다. 그 사람이 고개 동쪽에 이르러 장사 지내는 사람들이 아직 흩어지지 않은 것을 보고 그 사유를 자세히 이야기하여 무덤을 헤쳐 보니 다만 짚신 한 짝이 있을 뿐이었다. 지금 안강현의 북쪽에 혜숙이라는 절이 있는데, 곧 그가 살던 곳이라고 하며, 또한 부도(浮圖)
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봉안한 탑
도 있다. 승려 혜공(惠空)은 천진공(天眞公)의 집에서 고용살이를 하던 노파의 아들로 어릴 때의 이름은 우조(憂助)
방언(方言)인 듯함
였다. ……(중략)…… (혜공은) 늘 미친 듯이 크게 취해서 삼태기를 지고 거리에서 노래하고 춤추었으므로 부궤화상(負簣和尙)이라 불렀다. (그가) 있는 절을 이로 인하여 부개사(夫蓋寺)라고 하였는데, (부개는) 삼태기의 향언(鄕言)이다. 매번 절의 우물 속에 들어가면 몇 달씩 나오지 않으므로 스님의 이름으로 우물 이름을 지었다. 또한 우물에서 나올 때마다 푸른 옷을 입은 신동(神童)이 먼저 솟아 나왔으므로 절의 중들은 이것으로 (혜공이 나오는) 조짐을 삼았으며, 막상 나왔어도 옷은 젖지 않았다. 만년(晩年)에는 항사사(恒沙寺)
【지금의 영일현(迎日縣) 오어사(吾魚寺)이다. 민간에 전하기는 항하(恒河)
인도 갠지스 강
의 모래처럼 많은 사람이 출세하였으므로 항사동(恒沙洞)이라고 한다)】
로 옮겨 살았다. 이때 원효(元曉)가 여러 경전의 주해를 찬술하면서 매번 스님에게 가서 의심나는 것을 묻고 혹은 서로 농담도 하였다. 어느 날 두 사람이 시냇가에서 물고기와 새우를 잡아먹고 돌바닥 위에 대변을 보았다. 혜공이 이것을 가리켜 장난말로, “그대가 눈 똥은 내가 잡은 물고기이다.”라고 하였으므로 절 이름을 오어사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원효 스님의 말이라고 하나 잘못이다. 또한 그 시내를 잘못 불러 모의천(芼矣川)이라고 한다. 구참공(瞿旵公)이 일찍이 산에 놀러 갔다가 혜공이 산길 중에 죽어 넘어진 것을 보았는데, 그 시체가 부어터지고 살이 썩어 구더기가 나므로 오랫동안 슬피 탄식하였다. 그러다가 말고삐를 돌려 성으로 들어가자 혜공이 몹시 술에 취하여 시중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보았다.
또 어느 날은 풀로 새끼를 꼬아 가지고 영묘사(靈廟寺)에 들어가서 금당(金堂)과 좌우의 경루(經樓)와 남문의 낭무(廊廡)를 둘러 묶고 강사(剛司
승직(僧職)의 하나, 법회(法會)의 식사(式事)를 맡은 승려
에게 말하기를, “이 새끼를 꼭 3일 후에 걷어라.”라고 하였다. 강사가 이상히 여기면서 그대로 하였다. 과연 3일 만에 선덕왕(善德王)이 행차하여 절에 오자 지귀(志鬼)의 심중에서 불이 나와 그 탑을 태웠으나 오직 새끼로 둘러맨 곳만은 화재를 면하였다.『삼국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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