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통일 신라와 발해문화불교의 대중화

신라 하대 철조 불상의 유행

향도불(香徒佛)의 서문(銘文)과 서(序)

석가불(釋迦佛)이 그림자를 흐려 진원(眞源)에 돌아가고 의례(儀禮)를 옮겨 세간을 넘으며 세상에 기록하여 형상을 가려 삼천 대천 세계에 빛을 비추지 않고 돌아가신 지 1806년이 되었다. 이를 슬퍼하여 이 금상을 만들고자 … 인하여 서원(誓願)을 세웠다. 오직 바라건대 비천한 사람들이 마침내 창과 방망이를 스스로 쳐 긴 어둠에서 깨쳐날 것이며 게으르고 추한 뜻을 바꾸어 진리의 근원에 부합하며 바라건대 … 당(唐)나라 함통(咸通) 6년(신라 경문왕 5, 865) 정월 일에 신라국 한주(漢州) 북쪽 지방 철원군(鐵員郡)의 도피안사(到彼岸寺)에서 불상을 이룰 때에 … 이때에 거사(居士)를 찾아 1500여 명이 인연을 맺으니 금석(金石)과 같은 굳은 마음으로 부지런히 힘써 힘든 줄 몰랐다.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조상기

香徒佛銘文幷序

夫釋迦佛, 晦影歸眞, 遷儀越世, 紀世掩色, 不鏡三

千光歸, 一千八百六載耳. 慨斯恠斯, 彫此金容, □

□來哲, 因立願之. 唯願卑姓室, 遂棨椎自擊, □

□覺長昏, 換庸鄙志, 契眞源, 恕以色莫朴□見.

唐天子咸通六年乙酉正月日, 新羅國漢州北界

鐵員郡到彼岸寺, 成佛之時, 士□龍岳堅清, 于時□

覓居士, 結緣一千五百餘人, 堅金石志, 勤不覺勞因.

到彼岸寺 鐵造 毘盧蔗那佛坐像 造像記

이 사료는 도피안사(到彼岸寺) 비로자나불(毘盧蔗那佛)의 불좌상(佛座像) 뒷면에 새겨진 100여 자의 명문(銘文)으로, 당시 활발했던 불교 신앙 결사(結社)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특히 명문은 신라 하대 지방의 불교 활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명문 가운데 ‘함통(咸通) 6년 정월(正月)’이라는 문구가 있어, 이 불상의 제작 시기가 신라 경문왕(景文王) 5년(865)임을 알려 준다. 그리고 당시 철원군의 향도(香徒) 1500여 명이 열렬한 신앙심으로 비로자나불상을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에 따르면, 향도들은 석가가 입적 후 ‘3천광(三千光)’이 비치지 않은 지가 1806년이 되었음을 슬퍼하여 불상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석가 입적 후 정법(正法) 500년이나 1000년 후에는 말법의 시대가 온다고 하였다. 따라서 향도들이 석가 입적 후 1806년이 되었다고 밝히는 것은 그들이 당시를 말세(末世)로 인식하였음을 말해 준다. 그리고 말세를 벗어나려는 일념으로 비로자나불상을 조성한 것이다.

향도는 지역 공동체를 중심으로 승려와 신도들로 구성된 불교의 신앙 결사이다. 이들의 활동은 불상이나 사찰 등의 조성, 법회나 매향(埋香) 등의 신앙 활동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분포하였던 것으로 나타나는데, 20여 명 정도의 소규모 향도도 보이고 3000여 명에 이르는 대규모 향도도 있었다.

도피안사의 비로자나불을 조성한 향도들은 주로 철원 지역의 호족(豪族)들과 자영농으로 구성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이들이 당시를 말세로 인식한 것은 그들이 주로 경제적인 측면에서 어려운 처지에 놓이면서 사회에 강한 불만을 품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그리고 이와 같은 말세 의식은 한편으로 미륵불(彌勒佛)이 하생(下生)하는 이상 세계의 도래와도 연결된다. 궁예(弓裔, ?~918)의 철원 도읍은 당시 철원 지역의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가능하였을 것으로 이해된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신라 금석문의 말세의식과 미륵신앙」,『금석문을 통한 신라사연구』,장일규,한국학중앙연구원 편,2005.
저서
『한국조각사』, 문명대, 열화당, 1980.

관련 이미지

도피안사 철조 비로자나불좌상

관련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링크연결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