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통일 신라와 발해문화선종과 풍수지리설의 유행

도의와 신라의 선종

장경(長慶) 초에 이르러 도의(道義)라는 중이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 중국에 가서 서당(西堂)오지(奧旨)를 보았는데, 지혜의 빛이 지장선사(智藏禪師)와 비등해져서 돌아왔으니, 현계(玄契)를 처음 말한 사람이다. ……(중략)……

흥덕대왕(興德大王)께서 왕위를 계승하시고 선강태자(宣康太子)께서 감무를 하시게 됨에 이르러, 사악한 것을 제거하여 나라를 바르게 다스리고, 선(善)을 즐겨 왕가의 생활을 기름지게 하였다. 이때 홍척대사(洪陟大師)라고 하는 이가 있었는데, 그도 역시 서당에서 심인(心印)을 증득하였다. 남악(南岳)에 와서 발을 멈추니, 임금께서 하풍(下風)에 따르겠다는 소청의 뜻을 밝히셨고, 태자께서는 [도의가] 출산(出山)할 것이라는 기약을 경하하였다. ……(중략)……

중원에서 득도하고는 돌아오지 않거나 득법(得法)한 뒤에 돌아왔는데, 그중에서 거두(巨頭)가 된 사람을 손꼽아 셀 만하다. 중국에 귀화한 사람으로는 정중사(靜衆寺)의 무상(無相)과 상산(常山)의 혜각(慧覺)이니 곧 선보(禪譜)에서 익주김(益州金), 진주김(鎭州金)이라 한 사람이며, 고국에 돌아온 사람은 앞에서 말한 북산(北山)의 도의와 남악(南岳)의 홍척, 그리고 [아래로] 내려와서 대안사(大安寺)의 혜철국사(慧徹國師), 혜목산(慧目山)의 현욱(玄昱)⋅지력문(智力聞), 쌍계사(雙溪寺)의 혜소(慧昭)⋅신흥언(新興彦)⋅용암체(涌岩體)⋅진무휴(珍無休), 쌍봉사(雙峰寺)의 도윤(道允), 굴산사(崛山寺)의 범일(梵日)과 양조국사(兩朝國師)인 성주사(聖住寺)의 무염(無染) 등인데, 보리(菩提)의 종사(宗師)로서 덕이 두터워 중생의 아버지가 되고, 도가 높아 왕자의 스승이 되었으니, 옛날에 이른바 “세상의 명예를 구하지 않아도 명예가 나를 따르며, 명성을 피해 달아나도 명성이 나를 좇는다.”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모두들 교화가 중생 세계에 미쳤고, 행적이 부도와 비석에 전하였으며, 좋은 형제에 많은 자손이 있어 선정(禪定)의 숲이 계림(鷄林)에서 빼어나도록 하고, 지혜의 물이 접수(鰈水)1)에서 순탄하게 흐르도록 하였다.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1)접수(鰈水) : 『한서(漢書)』 권25 교사지(郊祀志)에서는 우리나라에 대하여 “동방에 비목어(比目魚, 눈이 나란히 몰린 물고기, 곧 가자미나 넙치를 말함)가 나며 이를 접(鰈, 가자미와 넙치류의 총칭)이라 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계림(鷄林)은 신라의 땅을, 접수(鰈水)는 신라의 바다를 말한다.

洎長慶初, 有僧道義, 西泛睹西堂之奧, 智光侔智藏而還, 智始語玄契者. ……(中略)……

及興德大王纂戎, 宣康太子監撫, 去邪毉國樂善肥家. 有洪陟大師, 亦西堂證心. 來南岳休足, 鷩冕陳順風之請, 龍樓慶開霧之期. ……(中略)……

或劍化延津, 或珠還合浦, 爲巨擘者, 可屈指焉. 西化則靜衆無相⋅常山慧覺, 禪譜益州金⋅鎭州金者是, 東歸則前所敍北山義⋅南岳陟, 而降大安徹國師, 慧目育⋅智力聞, 雙溪照⋅新興彦⋅涌岩體⋅珍丘休, 雙峰雲⋅孤山日, 兩朝國師聖住染, 菩提宗, 德之厚爲父衆生, 道之尊爲師王者, 古所謂, 逃名名我隨, 避聲聲我追者. 故皆化被恒沙, 蹟傳豊石. 有令兄弟, 宜爾子孫. 俾定林標秀於鷄林, 慧水安流於鰈水者矣.

「聞慶鳳巖寺智證大師塔碑」

이 사료는 최치원(崔致遠, 857~?)의 사산비명(四山碑銘)의 하나로 유명한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聞慶鳳巖寺智證大師塔碑, 국보 제315호)」이다. 이 탑비는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봉암사 경내에 있으며, 귀부 및 이수, 비좌의 조각이 뛰어나다. 비문 내용은 신라 선종사 이해에 가장 중요한 사료일 뿐만 아니라 신라 말 토지 소유 관계, 전장(田莊)의 성격 등을 연구할 때에도 기초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에는 희양산문(曦陽山門)을 개창한 지증대사 도헌(道憲, 824~882)에 관한 내용과 우리나라에 최초로 중국의 남종선(南宗禪)을 전한 도의(道義, ?~?)의 행적과 신라 사회에 선종(禪宗)이 전파되는 과정이 담겨 있다. 도의의 성은 왕씨(王氏)로, 법호는 명적(明寂)이며 시호는 원적(元寂)이다. 도의는 법명으로, 북한군(北漢郡) 출생이라 한다.

도의는 37년 동안 당나라에서 머무르다 821년(헌덕왕 13년) 귀국하여 남종선(南宗禪)을 펴고자 하였으나, 교학 불교와 먼저 들어와 있던 북종선(北宗禪)으로부터 환영 받지 못하였다. 사실 도의 이전에 북종선을 비롯한 선풍(禪風)이 전해졌으나, 왕성한 교종에 가려 크게 주목 받지는 못하였다. 경전을 숭상하고 불타에 귀의하는 법에 익숙하여, 무위(無爲)한 선종에 관심을 갖지 않고 오히려 허황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회 분위기는 도의를 설악산 진전사(陳田寺)에 은둔하게 만들었다. 이후 도의는 그곳에서 40년 동안 수도하다가 제자 염거(廉居, ?~844)에게 남종선을 전하고 죽었다. 염거의 제자 체징(體澄, 804~880)은 전라남도 장흥의 가지산에 가지산파(迦智山派)를 세워 크게 선풍을 떨쳤다. 그리고 도의를 제1세, 염거를 제2세, 자신을 제3세라고 하여 도의를 가지산파의 개산조로 삼았다.

도의가 남종선을 도입할 무렵 주목되는 인물이 바로 진감선사(眞鑑禪師) 혜소(慧昭, 774~850)이다. 두 사람은 중국 유학 때 만나 불법을 구하는 친구가 되었다. 도의가 귀국한 후 혜소는 중국에 3년을 더 머물다가 귀국하여 지리산 쌍계사에서 선문을 개창하였다. 도의와 혜소의 선풍이 어떻게 연관되는지 알려 주는 자료는 없으나, 이렇듯 비슷한 시기에 남종선을 도입하고 선문을 잇달아 개창하면서 신라 사회에 선종의 기반을 확산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신라 하대 전기 고승추모비의 건립」,『한국고대사연구』25,곽승훈,한국고대사학회,2002.
「최치원의 ‘지증대사적조탑비문’ 비교 연구」,『신라문화』35,김복순,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2010.
「원적 도의의 생애와 선사상」,『한국중세사연구』14,정동락,한국중세사학회,2003.
「신라하대 선종구산파의 성립-최치원의 사산비명을 중심으로-」,『한국사연구』7,최병헌,한국사연구회,1972.
「나말여초 선종의 사회적 성격」,『사학연구』25,최병헌,한국사학회,1975.
저서
『신라하대 선종사상사 연구』, 김두진, 일조각, 2007.
『신라사산비명』, 이우성, 아세아문화사, 1995.
『나말여초 선종산문 개창 연구』, 조범환, 경인문화사, 2008.
『나말여초 선종정책 연구』, 최인표, 한국학술정보, 2007.
『나말여초 선종사상사연구』, 추만호, 이론과 실천사, 1992.
편저
『한국불교선문의 형성사적 연구』, 불교학회 편, 민족사, 1986.
『주해사산비명』, 최영성 주해, 아세아문화사, 1987.

관련 이미지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

관련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링크연결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