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통일 신라와 발해문화선종과 풍수지리설의 유행

사굴산파의 범일 이야기

명주(溟州, 지금의 강릉) 굴산(崛山)의 고(故) 통효대사(通曉大師)는 염관(塩官)의 법을 이었다. 휘(諱)는 범일(梵日)이며, 계림(鷄林)의 호족인 김(金)씨였다. 조부의 휘는 술원(述元)이며, 벼슬이 명주(溟州) 도독까지 이르렀는데 청렴⋅공평하게 시속을 살피고, 너그러움과 용맹으로 사람을 대하니, 밝은 소문이 아직도 민요(民謠)에 남아 있고, 그 밖의 것은 전기에 갖추어 전하고 있다. 그의 어머니 지씨(支氏)는 여러 대를 내려오는 귀한 씨족으로서 세상에서 부녀의 모범이라 불렀다. ……(중략)……

나이 15세가 되어 출가할 뜻을 품고 부모에게 아뢰었다. ……(중략)…… 나이 20세에 서울[京師]에 가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는, ……(중략)……대화(大和) 연간에 이르러 혼자서 “중국으로 들어가 구법하리라.”라고 맹세하였다. 마침내 [당나라] 조정에 들어가는 왕자 김의종(金義琮)에게 그 뜻을 피력하니, 공이 선사의 착한 포부를 소중히 여기는 뜻에서 동행하기를 허락하므로, 그 배를 빌려 타고 당나라에 도달하였다. 이미 숙세의 원을 이룩했는지라 곧 순례의 길에 올라 지식을 두루 탐문하던 끝에 염관 제안대사(濟安大師)를 뵈었다. ……(중략)……

이때 고향에 돌아와 불법을 펼 생각을 내어 회창(會昌) 6년 정묘(丁卯, 문성왕 9년, 847년) 8월에 다시 뱃길에 올라 계림에 돌아오니, 정자 위를 비추는 달빛은 현토성(玄兎城)에 흐르고 교교한 여의주(如意珠)의 빛은 청구(靑丘)의 경계(境界)를 끝까지 비쳤다. 대중(大中) 5년(문성왕 13년, 851년) 정월 백달산(白達山)에서 연좌하고 있으니, 명주도독인 김공이 굴산사에 주석할 것을 청하였다. (여기에 응하여) 한번 숲 속에 앉은 뒤로는 40여 년 동안 줄지은 소나무로 도를 행하는 행랑을 삼고, 평평한 돌로써 좌선하는 자리를 삼았다. ……(중략)……

함통(咸通) 12년(경문왕 11년, 871년) 3월 경문대왕(景文大王)이, 광명(廣明) 원년(헌강왕 6년, 880년)에는 헌강대왕(憲康大王)이 모두 특별히 모시는 예를 다하여 멀리서 공경하고 사모하였으며 국사에 봉하기 위해 모두 사신을 보내어 서울로 모시려 했으나 선사께서 오랫동안 곧고 굳은 덕을 쌓았기에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조당집』권17, 명주굴산고통효대사

溟州崛山故通曉大師, 嗣塩官. 法諱梵日, 鳩林冠族金氏. 祖諱述元, 官至溟州都督, 廉平察俗寬猛臨人, 淸風尙在於民, 謠餘列備於傳乎. 其母支氏, 累葉豪門, 世稱婦範. ……(中略)……

年至一五誓願出家, 諮于父母, ……(中略)…… 年至二十, 到於京師, 受具足戒, ……(中略)…… 洎乎大和年中, 私發誓願往遊中華. 遂投入朝王子金公義琮, 披露所懷, 公以重善志, 許以同行, 假其舟檝達于唐國. 旣諧宿願. 便發巡遊, 遍尋知識, 叅彼塩官濟安大師. ……(中略)……

於是思歸故里, 弘宣佛法, 却以會昌六年丁卯八月, 還涉鯨浪返于鷄林, 亭亭戒月, 光流玄兎之城, 皎皎意珠, 照徹靑丘之境. 曁大中五年正月, 於白達山宴坐, 溟州都督金公仍請住崛山寺. 一坐林中四十餘載. 列松爲行道之廊, 平石作安禪之座. ……(中略)……

咸通十二年三月景文大王, 廣明元年憲康大王, 光啓三年定康大王, 三王並皆特迂御禮, 遙申欽仰擬封國師, 各差中使迎赴京師, 大師久蘊堅貞礭乎不赴矣.

『祖堂集』卷17, 溟州崛山故通曉大師

이 사료는 선종(禪宗) 9산문 가운데 하나인 사굴산문(闍崛山門)의 개창조인 통효대사(通曉大師) 범일(梵日, 810~889)의 비문이다. 그의 구법 행적과 강릉 굴산사(崛山寺)에서 사굴산문을 개창하는 과정을 소개하고 있어 신라 하대 선종 사상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자료이다.

사굴산문은 범일이 강원도 강릉 굴산사에서 일으킨 산문으로 사굴산파 또는 굴산선파라고도 일컬어진다. 범일은 847년(문성왕 9년) 무렵 당에서 귀국하여, 851년(문성왕 13년) 이후에 굴산사를 개창하고 그곳에서 40여 년간 후학을 양성하며 선법을 전파하였다. 범일이 사굴산문에 머무른 이후 경문왕(景文王, 재위 861~875)을 비롯하여 헌강왕(憲康王, 재위 875~886)과 정강왕(定康王, 재위 886~887)이 국사(國師)로 봉하여 도성으로 모시고자 하였으나, 범일은 매번 사양하였다.

범일의 사굴산문 개창과 관련해서는 김주원(金周元, ?~?)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주장도 있으나, 최근 연구 성과에 따르면 김주원의 후원이 아닌 중앙에서 파견된 명주도독의 후원 아래 이뤄졌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곧 사굴산문은 지방 호족 세력의 지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중앙 왕실과의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개창되었다는 것이다.

개창 이후 사굴산문은 굴산사를 중심으로 춘천의 건자암(建子庵)을 비롯하여 봉화의 태자사(太子寺), 삼척의 삼화사(三和寺) 등 영동 일대에 그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따라서 이 지역 내에 있던 화엄종(華嚴宗) 사찰들도 사굴산문 소속으로 흡수되어 갔다. 특히 강원도 지역에서 중요한 화엄종 사찰로서 경제적 기반이 튼튼하였던 낙산사도 굴산사의 영향력 아래에 들어가 사굴산문의 경제적 성장을 도왔다. 사굴산문은 많은 사찰을 말사로 거느리면서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하며 교단 규모를 확대하였다.

범일이 입적한 후에 사굴산문에는 서로 다른 길을 추구하는 교단이 생겼다. 범일의 두 제자인 행적(行寂, 832~916)과 개청(開淸, 835~930)이 굴산사를 벗어나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 것이다. 개청은 알찬(閼飡) 민규(閔規)의 후원으로 지장선원으로 가고, 행적은 굴산사를 떠나 경주에 이르러 효공왕(孝恭王, 재위 897~912)에 의해 국사(國師)가 되었다. 두 승려 모두 사굴산문의 정수를 이었다고 하지만, 이와 같이 상반되는 행위는 사굴산문의 분화를 가져오고 결국에는 사굴산문이 쇠퇴하는 결과까지 초래한 것으로 여겨진다.

범일은 도는 수행하거나 분별심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하여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를 주장하였다. 또 그는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를 통하여 깨달음은 조사나 부처를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자신의 몸으로 체험할 때에만 가능하다고 하였다. 이러한 평상심과 관련하여 그는 ‘자심(自心)’이 곧 부처라며, 깨달음은 이를 통하여 얻어야 한다면서 이를 아는 것이 선(禪)의 목적이라고 하였다. 또한 깨달음은 문자로 헤아릴 수 있는 경계가 아니라 오직 자신의 수행을 통해서만 직접 체험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수도자의 본분에 대해서는 “철두철미한 자기 본분의 자각을 수행의 목표로 삼을 것”을 강조하였다.

한편, 범일은 진표(眞表, ?~?)의 미륵신앙에 영향을 받아 간자(簡子)로 점을 쳐 낙산사에 정취보살상(正趣菩薩像)을 모시기도 하였다. 또한 사탑비보설(寺塔裨補說)에 근거하여 굴산사와 신복사(神福寺)도 창건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산신에 대한 믿음을 강렬히 드러내어 영적인 체험을 하기도 하였다.

범일의 법(法)은 사굴산문의 제자들에게 전해져 오다가 한국 불교의 중흥조인 지눌(知訥, 1158~1210)에게 계승되었으며, 이후 선문의 주류를 형성하면서 조계종(曹溪宗) 확립 등 한국 불교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강릉 지방 사람들은 범일이 죽은 뒤 그를 신격 존재로 승화시켜 대관령 성황신(大關嶺城隍神)으로 모시고 있으며, 또한 그를 강릉 단오제의 주신으로 숭상하고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신라하대 굴산문의 형성과 그 사상」,『성곡논총』17,김두진,성곡학술문화재단,1986.
「신라말 굴산문 범일과 김주원계 관련설의 비판적 검토」,『한국고대사연구』50,김흥삼,한국고대사학회,2008.
「범일의 선사상」,『대구사학』68,정동락,대구사학회,2002.
「통효 범일의 생애에 대한 재검토」,『민족문화논총』24,정동락,염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2001.
저서
『신라하대 선종사상사 연구』, 김두진, 일조각, 2007.
『나말여초 선종산문 개창 연구』, 조범환, 경인문화사, 2008.
『나말여초 선종정책 연구』, 최인표, 한국학술정보, 2007.
『나말려초 선종사상사연구』, 추만호, 이론과 실천사,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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