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통일 신라와 발해문화발해의 문화

온돌 문화의 발달

그 풍속에 가난한 사람이 많은데, 겨울에 모두 긴 구덩이를 만들고 그 아래에 불을 때서 따뜻하게 하였다.

『구당서』권199상, 「열전」149상 동이열전 고려

지대가 낮고 습하여 흙을 둑과 같이 쌓고 구덩이를 파서 거처한다. 출입구를 위로 향하게 내어 사다리를 놓고 드나든다.

『수서』권81, 「열전」46 동이열전 말갈

其俗貧窶者多, 冬月皆作長坑, 下燃熅火以取暖.

『舊唐書』卷199上, 「列傳」149上 東夷列傳 高麗

地卑濕, 築土如堤, 鑿穴以居, 開口向上, 以梯出入.

『隋書』卷81, 「列傳」46 東夷列傳 靺鞨

이 사료는 고구려인과 말갈인의 주거 방식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온돌(溫突) 문화를 비롯한 발해의 주거 방식과 관련해서는 문헌 자료가 드물어서 고고학 자료에 크게 의존하여 서술할 수밖에 없다. 그런 만큼 이 사료는 발해인의 주거 방식을 알려 주는 몇 안 되는 중요한 문헌 자료이다.

장갱(長坑), 난돌(暖堗), 구들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던 온돌은 아궁이에 불을 지펴 방바닥을 이루는 넓고 얇은 돌인 구들장을 데우는 방식이다. 즉 방 바깥의 아궁이에서 발생한 열기가 구들장과 이를 떠받치는 고래둑 사이 빈 통로인 고래를 지나면서 구들장을 데우게 되고, 연기는 굴뚝으로 빠져나가는 것이다. 이러한 온돌의 기원은 분명치 않으나, 초기 철기 시대 한반도 북부와 중국 동북 지방, 러시아 연해주 일대에 걸쳐 살았던 북옥저(北沃沮) 사람들이 처음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초기의 온돌은 방 한쪽에만 고래와 아궁이를 두고 난방하는 이른바 ‘쪽구들’이었다. 쪽구들 방식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는데, 17~18세기에 들어서면서 오늘날처럼 방 전체에 고래를 설치하고 방 바깥의 아궁이에서 불을 때는 방식으로 변하게 되었다.

위와 같은 온돌의 변천 과정으로 보아 고구려와 발해의 온돌 또한 쪽구들 방식이었음이 틀림 없다. 이와 관련해 가난한 고구려인은 겨울에 모두 갱(坑), 곧 기다란 구덩이를 만들고 그 아래에 불을 지펴 따뜻하게 하였다는 『구당서(舊唐書)』의 기록이 눈길을 끈다. 여기서 말하는 ‘기다란 구덩이’는 바로 고래를 가리키는데, 그 아래에 바로 불을 땐다는 점으로 보아 쪽구들 방식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와 달리 『수서(隋書)』에서는 말갈인이 흙을 둑과 같이 쌓고 구덩이를 파서 출입구를 위로 낸 다음 사다리를 통해 드나들었다고 하였다. 이로 보아 고구려인은 온돌을 이용해 난방을 한 반면, 말갈인은 별도의 난방 시설 없이 땅을 깊게 파는 형태로 하여 지열(地熱)을 이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고구려인과 말갈인의 겨울철 주거 방식은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은 발해의 종족 구성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그런데 지금까지 발해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지역에서 수많은 온돌 유적이 확인되었다. 우선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 용천부(上京龍泉府)의 궁성 서쪽 침전 터에서 모두 7개의 온돌 시설이 발굴되었고 북한 함경남도 신포시 오매리에서도 온돌 유적이 확인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러시아 연해주 지역의 노보고르데예프카, 스타로렌첸카, 코르사코프카, 콘스탄티노프카 유적 등에서도 온돌이 발굴되었고, 나아가 발해 유민이 거주하였던 것으로 여겨지는 아나니예프카 유적에서도 온돌이 발견되었다.

말갈인이 땅 속에 구덩이를 파고 생활하였다는 『수서』의 기록을 참고하면, 발해의 영역에서 보편적으로 확인되는 온돌 유구는 말갈인이 아니라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학계에서는 발해의 유적에서 발굴된 온돌 유구는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하였음을 뒷받침하는 하나의 물질적 증거로 인식하고 있다.

그런데 온돌을 사용한 계층은 고구려와 발해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고구려의 경우 도성과 같은 중심 지역에서는 온돌이 잘 확인되지 않고 오히려 서울의 아차산 보루처럼 변경을 지키기 위한 요새, 즉 관방(關防) 유적에서 온돌 시설이 다수 발굴되었다. 반면에 발해의 경우에는 수도와 지방 모두 온돌 유적이 발굴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온돌의 유입 경로와 사용 계층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다시 말해 고구려에서는 지방에서부터 온돌이 사용되기 시작하여 중앙으로 확산되었고, 온돌의 주요 사용층 또한 피지배층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와 달리 발해는 건국의 주체라 할 수 있는 고구려 유민들이 온돌을 사용하였던 까닭에, 발해에서 온돌 문화는 중앙에서 지방으로, 지배층에서 피지배층으로 확산되는 양상을 띠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발해의 온돌 문화는 발해의 정체성을 보여 주는 중요한 자료인 동시에, 한민족의 활동 무대를 알려 주는 지표라고 할 수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발해 온돌(구들)관련 유적의 재해석」,『한국건축역사학회 학술발표대회논문집』2011-10,김준봉⋅방학봉,한국건축역사학회,2011.
「고구려 난방 시설의 과학적인 특징에 관한 연구」,『고구려발해연구』11,서정호,고구려발해학회,2001.
「발해 온돌의 유래와 특징」,『한국 고대사 연구의 현단계』(석문 이기동교수 정년기념논총),송기호,주류성출판사,2009.
「중국 동북지역에서 온돌의 발전과정에 관한 연구」,『대한건축학회 학술발표대회 논문집(계획계)』 31-1,최운⋅강영환,대한건축학회,2011.
「고구려의 계승성을 통해 본 발해국의 정체성」,『고구려발해연구』18,한규철,고구려발해학회,2004.
저서
『한국 고대의 온돌 : 북옥저, 고구려, 발해』, 송기호,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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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온돌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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