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통일 신라와 발해문화발해의 문화

다양한 문화 요소의 융합

발해국(渤海國)은 고구려[高麗]1)의 옛 땅[故地]에 있다. ……(중략)…… 그 나라는 2,000리에 걸쳐 있다. 주현(州縣)과 관역(館驛)이 없고 곳곳에 촌락이 있는데 모두 말갈(靺鞨)의 부락이다. 그 백성은 말갈이 많고 토인(土人)이 적은데, 모두 토인을 촌장(村長)으로 삼는다. 대촌(大村)의 촌장은 도독(都督)이라 부르고 그 다음 [촌의 촌장]은 자사(刺史)라 부르며, [도독과 자사] 아래의 [촌장은] 백성들이 모두 수령(首領)이라 부른다. 토지는 지극히 추워서 논[농사] 농사에 적합하지 않으며, [그] 습속(習俗)은 글을 제법 안다. 고씨(高氏) 이래로 조공이 그치지 않았다.

『유취국사』권193, 수속 발해 상

발해 말갈(渤海靺鞨)의 대조영(大祚榮, 재위 698~719)은 본래 고구려[高麗]의 별종(別種)이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대조영은 집안 사람들을 이끌고 영주(營州)로 옮겨 와 살았다. 만세 통천(萬世通天) 연간(696~697)에 거란의 이진충(李盡忠, ?~696)이 반란을 일으키니, 대조영은 말갈의 걸사비우(乞四比羽)와 함께 각각 [그들의 무리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망명하였다. ……(중략)…… 대조영이 굳세고 용맹스러우며 용병(用兵)을 잘하였으므로, 말갈의 무리 및 고구려의 남은 무리가 점점 모여들었다. 성력(聖曆) 연간(698~700)에 스스로 진국왕(振國王)이 되어 돌궐(突厥)에 사신을 보내 친교를 맺었다. ……(중략)…… 풍속은 고구려 및 거란(契丹)과 같고, 자못 문자와 전적(典籍)도 있었다.

『구당서』권199하, 「열전」149하 북적 발해말갈

발해는 본래 속말 말갈(粟末靺鞨)로서 고구려[高麗]에 부속된 것이니, 성(姓)은 대씨(大氏)이다. ……(중략)…… 만세 통천(萬歲通天) 연간에 거란의 [이]진충([李]盡忠)이 영주 도독(營州都督) 조홰(趙翽)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자, 사리(舍利) 걸걸중상(乞乞仲象)이라는 자가 말갈의 추장(酋長) 걸사비우(乞四比羽) 및 고구려의 남은 종족과 함께 동쪽으로 달아났다.

『신당서』권219, 「열전」144 북적 발해

1)고구려는 국호를 “고려(高麗)”로 바꾸었다. 바뀐 국호가 중국 문헌에 나타난 확실한 시기는 장수왕 8년 이후 11년과 23년(435)이지만, 국호의 개칭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며 대략 5세기 정도로만 추정된다. 발췌된 사료에서는 모두 고려로 쓰고 있으나, 이후 태조 왕건이 세운 고려와 구분하기 위하여 고구려로 표기하였다.

渤海國者, 高麗之故地也. ……(中略)…… 其國延袤二千里. 無州縣館驛, 處處有村里, 皆靺鞨部落. 其百姓者, 靺鞨多土人少, 皆以土人爲村長. 大村曰都督, 次曰刺史, 其下百姓皆曰首領. 土地極寒, 不宜水田, 俗頗知書. 自高氏以來, 朝貢不絶.

『類聚國史』卷193, 殊俗 渤海 上

渤海靺鞨大祚榮者, 本高麗別種也. 高麗旣滅, 祚榮率家屬徙居營州. 萬歲通天年, 契丹李盡忠反叛, 祚榮與靺鞨乞四比羽各領亡命東奔. ……(中略)…… 祚榮驍勇善用兵, 靺鞨之衆及高麗餘燼, 稍稍歸之. 聖曆中, 自立爲振國王, 遣使通于突厥. ……(中略)…… 風俗與高麗及契丹同, 頗有文字及書記.

『舊唐書』卷199下, 「列傳」149下 北狄 渤海靺鞨

渤海, 本粟末靺鞨附高麗者, 姓大氏. ……(中略)…… 萬歲通天中, 契丹盡忠殺營州都督趙翽反, 有舍利乞乞仲象者, 與靺鞨酋乞四比羽及高麗餘種東走.

『新唐書』卷219, 「列傳」144 北狄 渤海

이 사료는 발해의 주민 구성과 관련한 내용을 담고 있다. 발해는 자신들의 손으로 남겨 놓은 사료가 없기 때문에 발해사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발해의 존속 시기와 비교적 가까운 시기에 편찬된 중국 또는 일본 측 사료에 많이 의존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일본에서 편찬한 『유취국사(類聚國史)』나 중국에서 편찬한 『구당서(舊唐書)』 및 『신당서(新唐書)』에서 발해의 주민 구성과 관련된 사료를 선별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세 사료에서 발해의 주민 구성은 조금씩 다르게 기술되어 있다. 먼저 『유취국사』에 따르면 발해의 주민은 말갈인이 가장 많고 토인(土人)은 그보다 적지만, 모두 토인을 촌장으로 삼는다고 한다. “발해국은 고려(고구려)의 옛 땅[故地]에 있다.”거나 “고씨(高氏) 이래로 조공이 그치지 않았다.”라는 점을 염두에 둘 경우, ‘토인’은 토착 원주민인 고구려계 사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발해의 주민 구성 비율만 놓고 보면 말갈인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지만, 지배층은 대체로 고구려인이 차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반면, 『구당서』 발해전을 살펴보면 발해를 건국한 주체로 고구려의 별종(別種)후손인 대조영(大祚榮, 재위 698~719)과 말갈인인 걸사비우(乞四比羽)가 등장한다. 그리고 『신당서』 발해전에서도 말갈인과 고구려 종족이 연합하여 영주(營州)에서 동쪽으로 달아난 것을 발해 건국의 출발 지점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렇듯 『유취국사』와 『구당서』, 『신당서』를 종합해 보면 발해의 건국에 참여하였거나 발해 주민을 구성하였던 것으로 언급된 종족은 고구려인과 말갈인이다.

발해는 이처럼 복수의 종족으로 구성된 까닭에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다양한 양상이 나타난다. 가령 온돌 사용이나 치(雉)⋅옹성(甕城)과 같은 성곽 시설에서는 고구려적인 요소가 두드러진다. 하지만 관(罐)이라 불리는 토기 항아리에서는 말갈적인 요소가 많이 반영되어 있다. 그뿐만 아니라 『신당서』 발해전에서 발해 중앙 관제에 대해 언급한 말미에 “대개 [발해의] 직제가 중국 제도를 본받았다.”고 기술한 점 역시 간과할 수 없다. 상경성(上京城)에서는 폭 110m의 주작 대로(朱雀大路)가 확인되었는데, 고구려나 백제, 신라에서는 도로의 폭이 30m가 넘는 남북 대로는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어 상경성의 주작 대로는 당(唐)나라 장안성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 점에서 발해 문화에는 고구려와 말갈적인 요소는 물론이고 당나라적인 요소도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구당서』 발해전에서 발해의 “풍속은 고려(고구려) 및 거란(契丹)과 같다.”고 한 점에 비추어 보면, 발해의 풍속에는 거란적인 요소도 어느 정도 가미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렇듯 발해의 문화 속에는 고구려, 말갈, 당나라, 거란적 요소가 함께 존재하였다. 그렇다고 발해에서 각 나라의 문화 요소가 서로 배타적이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서로 융합적인 양상을 띠었던 것 같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육정산 고분군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고분군에는 발해를 건국하였던 왕족과 귀족이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데, 여러 기의 고분을 발굴해 본 결과 고분의 구조나 세부적인 시설에서는 고구려 고분과의 연관성이 강하게 드러난다. 반면 다인장(多人葬)이나 매장 시 짐승 뼈를 함께 넣은 점, 관(罐)을 포함한 토기의 부장 양상 등에서는 말갈적인 요소가 두드러지게 확인되었다. 즉 고분의 양식적인 측면에서는 고구려적인 요소가, 매장 방식에서는 말갈적인 요소가 결합되어 있는 것으로 밝혀진 것이다. 이 점은 결국 발해가 여러 종족의 다양한 문화 요소를 융합시키면서 발해 나름의 독창적인 문화를 만들어갔던 한 단면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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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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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대외관계사』, 한규철, 신서원, 1994.
편저
「발해의 성립과 발전」, 노태돈, 국사편찬위원회,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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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묘제」, 이남석, 동북아역사재단, 2007.
「발해의 건축 문화」, 이병건, 동북아역사재단, 2007.
「발해의 건국 주체와 국가 성격」, 한규철, 동북아역사재단,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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