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진(祿眞)은 성(姓)과 자(字)를 알 수 없으나 아버지는 일길찬(一吉湌) 수봉(秀奉)이다. 녹진이 23세에 비로소 벼슬하여 여러 차례 내외의 관직을 역임하다가 헌덕대왕(憲德大王) 10년(818) 무술(戊戌)에 집사시랑(執事侍郎)이 되었다. (헌덕왕) 14년(822)에 국왕에게 왕위를 이을 아들이 없었으므로 동복(同腹)의 아우 수종(秀宗)을 태자(太子)로 삼아 월지궁(月池宮)에 들게 하였다. 이때 각간(角干) 충공(忠恭)이 상대등(上大等)
이 되어 정사당(政事堂)에 앉아 내외 관원을 선발하는 일을 하고 퇴근하였다가 병에 걸렸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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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진이 나아가 “듣건대 귀하신 몸이 편안하지 않으시다 하오니, 이는 아침 일찍 출근하고 저녁 늦게 퇴근하여 이슬과 찬바람에 시달려 혈기가 조화를 잃어 몸이 불편하신 것이 아닙니까?”라고 하였다. (충공이) 말하기를 “그런 정도는 아니다. 다만 어릿어릿하여 정신이 개운치 않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녹진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공의 병환은 반드시 약이나 침이 필요하지 않고, 지당한 말과 높은 담론으로 한번 쳐서 깨칠 수가 있습니다. 공은 이를 들어 주시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충공이) 말하기를 “그대가 나를 멀리 버리지 않고 특별히 와 주었으니, 원컨대 좋은 말을 들려주어 나의 가슴속을 씻어 주시오!”라고 하였다.
녹진이 말하였다. “목수가 집을 짓는 데 재목이 큰 것은 보와 기둥으로 삼고 작은 것은 서까래로 삼으며, 휜 것과 곧은 것이 각기 적당한 자리에 들어간 후에야 큰 집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옛날에 어진 재상이 정사를 처리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큰 인재는 높은 지위에 두고 작은 인재는 가벼운 소임을 준다면 안으로 6관(官)과 온갖 관서, 밖으로 방백(方伯)⋅연솔(連率)⋅군수⋅현령에 이르기까지 조정에는 빈 직위가 없고, 직위마다 부적당한 사람이 없을 것이며, 상하의 질서가 정해지고 어진 이와 어리석은 자가 구별될 것입니다. 그런 후에야 왕정(王政)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사로움에 의하여 공심(公心)이 멸해지고, 사람을 위하여 관직을 택하며, 총애하면 비록 재목이 아니더라도 아주 높은 곳으로 보내려 하고, 미워하면 유능하더라도 구렁에 빠뜨리려 합니다. 취하고 버림에 그 마음이 뒤섞이고 옳고 그름을 따짐에 그 뜻이 어지럽게 되면, 비단 나라 일이 혼탁해질 뿐만 아니라 그 일을 하는 사람 역시 수고롭고 병들 것입니다. 만약 관직을 맡음에 청백하고, 일을 처리함에 신중하고, 정성껏 하여 뇌물의 길을 막고, 청탁하는 폐단을 멀리하며, 승진과 강등을 오직 그 사람의 어둠과 밝음으로써만 하고, 관직을 주고 뺏는 것을 사랑과 미움으로써 하지 않는다면, 저울에 다는 것처럼 경중(輕重)이 잘못되지 않고 먹줄처럼 곡직(曲直)이 속여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형정(刑政)이 실로 엄숙해지고 국가가 화평하여, 비록 공손홍(公孫弘)처럼 집의 문을 열어 놓고, 조참(曹參)과 같이 술을 내면서, 친구들과 담소하고 즐겨도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이것저것 약을 먹느라고 부질없이 시간을 소비하며 사무를 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각간은 이에 의관(醫官)을 사양해 돌려보내고 수레를 타고 왕궁에 입조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경(卿)에게 날짜를 정해 놓고 약을 먹으라고 하였는데 어찌하여 조정에 나왔는가?”라고 하였다. [충공이] 대답하기를, “신이 녹진의 말을 들으니 약석(藥石)과 같았습니다. 어찌 용치탕(龍齒湯)을 마시는 데 그칠 정도이겠습니까?”라고 하며, 이어 왕을 위하여 일일이 이야기하였다. ……(하략)……
『삼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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