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주(溟州, 지금의 강릉) 굴산(崛山)의 고(故) 통효대사(通曉大師)는 염관(塩官)의 법을 이었다. 휘(諱)는 범일(梵日)이며, 계림(鷄林)의 호족인 김(金)씨였다. 조부의 휘는 술원(述元)이며, 벼슬이 명주(溟州) 도독까지 이르렀는데 청렴⋅공평하게 시속을 살피고, 너그러움과 용맹으로 사람을 대하니, 밝은 소문이 아직도 민요(民謠)에 남아 있고, 그 밖의 것은 전기에 갖추어 전하고 있다. 그의 어머니 지씨(支氏)는 여러 대를 내려오는 귀한 씨족으로서 세상에서 부녀의 모범이라 불렀다. ……(중략)……
나이 15세가 되어 출가할 뜻을 품고 부모에게 아뢰었다. ……(중략)…… 나이 20세에 서울[京師]에 가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는, ……(중략)……대화(大和)
당나라 문종(文宗)의 연호, 827~835
연간에 이르러 혼자서 “중국으로 들어가 구법하리라.”라고 맹세하였다. 마침내 [당나라] 조정에 들어가는 왕자 김의종(金義琮)에게 그 뜻을 피력하니, 공이 선사의 착한 포부를 소중히 여기는 뜻에서 동행하기를 허락하므로, 그 배를 빌려 타고 당나라에 도달하였다. 이미 숙세의 원을 이룩했는지라 곧 순례의 길에 올라 지식을 두루 탐문하던 끝에 염관 제안대사(濟安大師)를 뵈었다. ……(중략)…… 이때 고향에 돌아와 불법을 펼 생각을 내어 회창(會昌) 6년 정묘(丁卯, 문성왕 9년, 847년) 8월에 다시 뱃길에 올라 계림에 돌아오니, 정자 위를 비추는 달빛은 현토성(玄兎城)에 흐르고 교교한 여의주(如意珠)의 빛은 청구(靑丘)의 경계(境界)를 끝까지 비쳤다. 대중(大中) 5년(문성왕 13년, 851년) 정월 백달산(白達山)에서 연좌하고 있으니, 명주도독인 김공이 굴산사에 주석할 것을 청하였다. (여기에 응하여) 한번 숲 속에 앉은 뒤로는 40여 년 동안 줄지은 소나무로 도를 행하는 행랑을 삼고, 평평한 돌로써 좌선하는 자리를 삼았다. ……(중략)……
함통(咸通) 12년(경문왕 11년, 871년) 3월 경문대왕(景文大王)이, 광명(廣明) 원년(헌강왕 6년, 880년)에는 헌강대왕(憲康大王)이 모두 특별히 모시는 예를 다하여 멀리서 공경하고 사모하였으며 국사
에 봉하기 위해 모두 사신을 보내어 서울로 모시려 했으나 선사께서 오랫동안 곧고 굳은 덕을 쌓았기에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국사' 관련자료
『조당집』권17, 명주굴산고통효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