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고려 시대정치통치 체제의 정비

최승로의 시무28조

6월에 명령하기를, “임금의 덕은 오직 신하의 보필에 달려 있다. 짐이 새로 정무를 총괄하게 되었으니 잘못된 정사가 있을까 걱정된다. 경관(京官) 5품 이상은 각기 봉사를 올려 시정(時政)의 잘잘못을 논하라" 하였다.

정광(正匡) 행선관어사(行選官御事) 상주국(上柱國) 최승로(崔承老)가 글을 써 바쳤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신이 삼가 보건대, 개원(開元) 연간에 사관 오긍(吳兢)이『정관정요(貞觀政要)』를 지어 올려 현종(玄宗)에게 태종(太宗)의 정치를 닦도록 건의한 것은, 대개 어떤 일이 일어난 본질은 서로 비슷하여 한 집안의 일에서 벗어나지 않고 그 정치를 잘 하여서 본보기가 될 만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태조가 건국한 때로부터 신이 아는 것은 모두 신의 마음에 기억하고 있으니, 이제 삼가 역대 5대 왕의 정치와 교화에서 본받을 만하거나 조심할 만한, 잘되고 잘못되었던 역사를 기록하여 조목별로 아뢰어 드리겠습니다. ……(중략)……

무릇 역대 사조(四朝) 왕이 정사를 행한 자취는 대략 이와 같으니 성상께서는 마땅히 잘한 것은 취하여 행하고 잘못한 것을 보고서는 경계하여, 긴급하지 않은 일은 제거하고 이로울 것이 없는 쓸데없는 노동은 폐지해서 다만 임금은 위에서 편안하고 백성은 아래서 기뻐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시작을 잘하는 마음을 이어 유종의 미를 생각하여, 날로 더욱 조심하여 비록 훌륭하여도 훌륭하게 여기지 말며, 비록 귀하게 군주가 되었지만 스스로 높은 체하지 말고, 재덕을 많이 가졌지만 교만하고 자랑하지 않고, 오직 스스로를 낮춰 공경하는 마음을 돈독히 하고 백성을 근심하는 생각이 끊이지 않는다면, 복은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르고 재앙은 기도하지 않아도 저절로 소멸될 것이니, 성군께서 어찌 만년을 누리지 않으며, 왕업이 어찌 백세만 전할 뿐이겠습니까. 신은 또한 시무(時務) 28조를 기록하여 장계와 함께 별도로 봉하여 올립니다.……(중략)……

왕이 백성을 다스리는 것은 집집마다 가서 돌보고 날마다 이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수령을 파견하여 가서 백성의 이익과 손해를 살피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태조께서 나라를 통일한 후에 외관(外官)을 두고자 하였으나, 대개 초창기에 일이 번잡하여 미처 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지금 보건대 지방의 호족들이 항상 국가의 일이라고 속이고 백성을 수탈하니 백성이 그 명령을 견뎌내지 못하므로 외관을 두기를 청합니다. 비록 모든 지역에 한꺼번에 다 보낼 수는 없더라도 먼저 10여 주⋅현을 묶어 하나의 관청을 두고 관청마다 두세 명의 관원을 두어 백성 다스리는 일을 맡기소서.……(중략)……

중국의 제도는 따르지 않아서는 안 되지만, 천하의 세속 풍습은 각각 그 지역의 토성(土性)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전부 고치기는 어렵습니다. 그 예⋅악⋅시⋅서의 가르침과 군신⋅부자의 도리는 마땅히 중국을 본받아 비루한 풍속을 고쳐야 되겠지만, 그 밖의 거마(車馬)⋅의복의 제도는 그 나라의 풍속대로 하여 사치와 검소를 알맞게 하되 굳이 중국과 같이 할 필요는 없습니다.……(중략)……

우리나라에서는 봄에는 연등회를 벌이고 겨울에는 팔관회를 개최하는데, 사람을 많이 동원하고 쓸데없는 노동이 많으니, 원컨대 그 가감을 살펴서 백성이 힘을 낼 수 있게 해 주소서. 또 갖가지 인형을 만들어 비용이 매우 많이 드는데, 한 번 쓰고 난 후에는 바로 부수어 버리니 이 또한 매우 사리에 맞지 않습니다. 더구나 인형은 흉례(凶禮)가 아니면 쓰지 않는 것이므로 서조(西朝)의 사신이 그 전에 와서 이것을 보고 상서롭지 못하다고 하면서 얼굴을 가리고 지나쳤으니, 원컨대 지금부터는 사용을 허락하지 마소서.……(중략)……

원컨대 성상께서 날로 더욱 조심하여 스스로 교만하지 말고, 아랫사람을 대할 적에 공손히 할 것을 생각하고, 혹시 죄지은 자가 있을 때 처벌의 경중을 모두 법대로 결정한다면 태평할 수 있을 것입니다.……(중략)……

불교를 행하는 것은 몸을 닦는 근본이며 유교를 행하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근원이니, 몸을 닦는 것은 다음 생을 위한 밑천이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곧 지금의 할 일입니다. 오늘날은 지극히 가깝고 다음 생은 지극히 머니, 가까운 것을 버리고 먼 것을 구하는 일이 또한 그릇된 것이 아닙니까.”

『고려사절요』권2, 성종문의대왕 임오 원년 6월

六月, 制曰, 后德惟臣. 朕新摠萬幾, 恐有闕政. 其京官五品以上, 各上封事, 論時政得失. 正匡行選官御事上柱國崔承老上書, 略曰. 臣竊見, 開元史臣吳兢撰進貞觀政要, 勸玄宗. 勤修太宗之政, 蓋以事體相近, 不出一家, 而其政休明, 可爲師範故也. 自我太祖, 開國已來臣所及知者, 皆誦在臣心, 今謹錄五朝政化善惡之跡, 可鑑可戒者, 謹條奏以聞. ……(中略)……

凡四朝爲政之跡, 大略如是, 聖上宜取其善者而行之, 見其不善而誡之, 除不急之務, 罷無益之勞, 但要君安於上, 民悅於下. 因善始之心, 慮克終之美, 日愼一日, 雖休勿休, 雖貴爲君主而不自尊大, 富有才德而不自驕矜, 唯敦恭己之情, 不絶憂民之念, 則福不求而自至, 灾不禳而自消, 聖君胡不萬年, 王業豈唯百世而已哉. 臣又錄時務二十八條, 隨狀別封以進. ……(中略)……

王者之理民, 非家至而日見之. 故分遣守令, 往察百姓利害. 我聖祖統合之後, 欲置外官, 蓋因草創, 事煩未遑. 今竊見, 鄕豪每假公務, 侵暴百姓, 民不堪命, 請置外官. 雖不得一時盡遣, 先於十數州縣, 幷置一官, 官各設兩三員, 以委撫字. ……(中略)……

華夏之制, 不可不遵, 然四方俗習, 各隨土性, 似難盡變. 其禮樂詩書之敎, 君臣父子之道, 宜法中華, 以革卑陋,其餘車馬衣服制度, 可因土風, 使奢儉得中, 不必苟同. ……(中略)……

我國春設燃燈, 冬開八關, 廣徵人衆, 勞役甚煩, 願加减省, 以紓民力. 又造種種偶人, 工費甚多, 一進之後, 便加毁破, 亦甚無謂也. 且偶人非凶禮不用, 西朝使臣, 嘗來見之, 以爲不祥, 掩面而過, 願自今勿許用之. ……(中略)……

願聖上, 日愼一日, 不自驕滿, 接下思恭, 儻或有罪者, 輕重並論如法, 則太平之業, 可立待也. ……(中略)……

行釋敎者, 修身之本, 行儒敎者, 理國之源, 修身是來生之資, 理國乃今日之務. 今日至近, 來生至遠, 舍近求遠, 不亦謬乎.

『高麗史節要』卷2, 成宗文懿大王 壬午 元年 6月

이 사료는 성종(成宗, 재위 981~997)이 981년 즉위한 그해 새로운 정치 이념과 통치 체제를 구현할 목적으로 정5품 이상의 모든 관리에게 시무와 관련한 상소를 올릴 것을 명하자, 이에 최승로(崔承老, 927~989)가 답으로 올린 글이다. 최승로는 당나라 사관 오긍(吳兢)이 『정관정요(貞觀政要)』를 편찬한 경위, 곧 현종(玄宗, 재위 712~756)에게 태종(太宗, 재위 629~649)의 정치를 본받아 이상적인 군주로서의 자질을 갖출 것을 권한 내용을 참고하여 장문의 시무책 28조항을 올렸다.

최승로는 신라 6두품 최은함(崔殷諴)의 아들이다. 최은함은 935년(태조 18년) 신라가 고려에 항복할 때 고려에 들어온 이후 고려 조정에 협조하였다. 최승로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유교 경전에 밝았으며, 광종(光宗, 재위 949~975) 때는 신진 관료로 등용되어 국가의 문서 작성을 맡았으며 중국에 보내는 외교 문서를 짓기도 하였다.

최승로가 지은 이 시무 상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앞부분은 성종 이전의 왕인 태조(太祖, 재위 918~943), 혜종(惠宗, 재위 943~945), 정종(定宗, 재위 945~949), 광종, 경종(景宗, 재위 975~981)에 이르는 5대조의 정치에 대하여 본받을 것과 경계할 것을 평한 「오조정적평(五朝政績評)」이고, 뒷부분은 왕을 위해 당시의 구체적인 시무책을 제시한 「시무 28조」이다.

앞부분의 내용을 요약하면, 군주는 신하들을 예로써 잘 접대하여 공경하고, 참언을 멀리하며, 사악한 자를 주저 없이 제거할 수 있는 결단력과 통찰력을 바탕으로 유교적 정치 이념에 투철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한 차원에서 태조에게는 넓은 도량과 포용력을, 혜종에게는 왕족 간의 우애를, 정종에게는 사직을 보존하려는 의지를, 광종에게는 공평무사함을, 경종에게는 현명한 판단을 배우도록 권하였다. 아울러 각 왕의 정치적 잘못 또한 함께 열거하면서 이를 되풀이 하지 말아야 함을 함께 제시하였다. 특히 광종과 같은 전제주의 군주 모습에는 격렬히 반대하였으며, 또 권신에 의해 정권이 독점되는 것 역시 비판하였다.

시무 28조」는 현재 22조의 내용만 전해지는데,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그는 중앙집권 체제를 강조하여 상주하는 외관을 파견할 것과 지방의 호족 세력을 억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유교와 불교의 기능은 구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유교는 국가를 다스리는 이념인 반면 불교는 수신의 근본이며 내생(來生)을 위한 것임을 말하였다. 또 이와 관련해 불교 승려에 대한 지나친 예우를 삼가고 연등회팔관회 등의 행사를 철폐하는 한편, 유교 사상을 통해 왕도 정치를 실현할 것을 주장하였다. 다음으로 광종 대에 지나치게 강화된 왕의 군대와 궁중 노비를 줄여야 하며, 귀족 관료의 권위와 특권을 강하게 옹호하고 예우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 외에 중국에 보내는 사신의 수를 줄이고 사무역을 금해야 한다고 보았으며, 양인과 천민에 대한 법 등을 확립하여 엄격한 신분 제도를 유지할 것을 주장하는 등 그의 식견은 정치, 경제, 국방, 문화, 사회, 행정 전 분야를 망라하고 있다.

이러한 최승로의 「시무 28조」는 대부분 성종 대 국가 정책에 반영되었다. 중앙 정부는 지방 행정조직을 정비하고, 지방을 통제하기 위해 전국의 주요 지역에 12목을 설치하였으며 상주하는 외관(지방관)을 파견하게 되었다. 또한 불교 행사가 억제되어 팔관회는 폐지되고 집을 절로 삼는 것도 금지되었다. 아울러 국자감(國子監)을 중수하고 12목에는 경학박사를 파견하는 등 유학 교육을 진흥했는데 이러한 일련의 조치는 고려 사회를 귀족 중심의 안정된 국가로 이끄는 밑거름이 되었다. 이 사료는 바로 그러한 고려의 중앙 통치 이념과 체제가 정비되어 가는 과정을 잘 보여 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고려 성종대 정치세력의 성격과 동향」,『한국중세사연구』14,구산우,한국중세사학회,2003.
「최승로의 시무이십팔조」,『조명기화갑기념 불교사학논총』,김철준,지식산업사,1975.
「신라통일기 및 고려초기의 유교적 정치이념」,『대동문화연구』6⋅7,이기백,한국연구원,1978.
「최승로의 정치사상」,『산운사학』3,이재운,산운학술문화재단,1989.
「고려초기 최승로의 정치사상 연구」,『이대사원』12,하현강,이화여자대학교 사학회,1975.
저서
『고려귀족사회의 형성』, 이기백, 일조각, 1990.
편저
「고려 귀족사회의 성립」, 김갑동, 국사편찬위원회, 1993.
「집권적 귀족정치의 이념」, 이기백, 국사편찬위원회, 1974.

관련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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