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관(尹瓘)
이 참지정사 판상서형부사 겸 태자빈객으로 벼슬을 옮겼다. 그가 아뢰기를 “신이 적의 기세를 보니 강성함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니 마땅히 군사를 쉬면서 대비하여 후일을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또 신의 패한 바는 적은 기병이고 우리는 보병이어서 가히 대적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건의하여 처음으로 별무반(別武班)
을 세우고 문무 산관(散官)과 이서(吏胥)로부터 상인과 노비 및 주(州)⋅부(府)⋅군(郡)⋅현(縣)에 이르기까지 무릇 말을 가진 자는 다 신기군(神騎軍)으로 삼았고, 말이 없는 자는 신보군(神步軍)⋅도탕군(跳蕩軍)⋅경궁군(梗弓軍)⋅정노군(精弩軍)⋅발화군(發火軍) 등에 속하게 했다. 나이 20세 이상인 남자 가운데 과거 시험을 보는 자가 아니면 다 신보군(神步軍)에 소속시키고, 서반(西班)과 모든 진⋅부(鎭⋅府)의 군인(軍人)은 4계절마다 훈련시키고, 또 승도(僧徒)를 뽑아 항마군(降魔軍)으로 삼았다. 마침내 군사를 훈련하며 곡식을 저축하여 다시 군대를 일으킬 것을 도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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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권96, 「열전」9 [제신] 윤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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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에 왕이 위봉루(威鳳樓)를 방문하여 윤관(尹瓘)
⋅오연총(吳延寵)에게 부월(鈇鉞)
과 오연총이 동계에 이르러 장춘역(長春驛)에 병사를 주둔하였다. 군사의 수가 대강 17만인데 20만이라 하였다. 병마판관 최홍정(崔弘正)⋅황군상(黃君裳)을 정주(定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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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 나가는 장군에게 임금이 군사권을 위임한다는 뜻으로 주는 도끼
을 하사하여 파견하였다. 을유일에 윤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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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북도 정주
와 장주(長州)
함경남도 정평
2주에 나눠 보내고, 여진 추장을 속여서 말하기를, “우리나라에서 허정(許貞)과 나불(羅弗) 등을 돌려보내려고 하니 너희들은 와서 명을 들으라" 하였다. 추장이 이를 믿고 고라(古羅) 등 400여 명과 함께 오니, 이들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하고 복병을 출동시켜 이를 섬멸하였다. ……(中略)…… 을미일에 윤관
은 5만 3000명을 이끌고 정주 대화문(大和門)으로 나가고, 중군병마 김한충(金漢忠)은 3만 6700명을 이끌고 안륙수(安陸戍)
문관은 3만 3900명을 이끌고 정주 홍화문(弘化門)으로 나갔다. 우군병마사
김덕진은 4만 3800명을 이끌고 선덕진(宣德鎭)
이 대내파지촌(大乃巴只村)
은 병마령할(兵馬鈴轄) 임언과 홍정에게 정예병을 거느리고 급히 공격하도록 하니 적을 패하여 달아나버렸다. ……(中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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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남도 정평 부근
로 나가고, 좌군병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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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남도 함주
과 안해(安海) 양수(兩戍) 사이로 나가서 막고, 선병별감(船兵別監) 양유송(梁惟竦), 원흥도부서사(元興都部署使) 정숭용(鄭崇用), 진명도부서부사(鎭溟都部署副使) 견응도(甄應陶) 등은 수군 2600명을 이끌고 도린포(道麟浦)로 나갔다. 윤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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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남도 함주
을 지나서 반나절을 행군하자 여진은 그 군사의 위엄이 매우 장대함을 보고 모두 도망쳐 달아나 가축들만 들에 널렸다. 문내니촌(文乃泥村)에 이르니 적이 동음성(冬音城)으로 들어가 지켰다. 그러자 윤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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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신일에) 중군은 고사한(高史漢) 등 35촌을 격파하여, 380급을 베고 230명을 사로잡았다. 우군은 광탄(廣灘) 등 32촌을 격파하여 290급을 베고 300명을 사로잡았다. 좌군은 심곤(深昆) 등 31촌을 격파하여 950급을 베었다. 윤관
은 대내파지에서부터 37촌을 격파하여 2120급을 베고 500명을 사로잡았다. 녹사 유영약(兪瑩若)을 보내어 승리를 알리니 왕이 기뻐하여 유영약에게 7품의 직을 주고, 좌부승지⋅병부낭중 심후(沈侯)와 내시⋅형부원외랑 한교여(韓皦如)에게 명하여 조서를 내려 윤관
⋅오연총 및 여러 장수를 격려하고 위로하였으며 물품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윤관
은 또 여러 장수를 나누어 보내어 땅의 경계를 확정하고, 또 일관(日官) 최자호(崔資顥)를 보내어 터를 보아 몽라골령(蒙羅骨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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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남도 초황령
아래에 성(城) 950칸을 쌓아 영주(英州)라 부르고, 화곶산(火串山) 아래에 992칸을 쌓아 웅주(雄州)라 하고, 오림금촌(吳林金村)에 774칸을 쌓아 복주(福州)라 하고, 궁한이촌(弓漢伊村)에 670칸을 쌓아 길주(吉州)라 불렀다. 또 호국인왕(護國仁王)과 진동보제(鎭東普濟) 두 절을 영주성 안에 창건하였다.『고려사절요』권7, 예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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