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부식(富軾) 등은 아뢰옵니다.
지난 을묘년(1135, 고려 인종
13) 봄 정월에 서경(西京)
이 반역을 계획하므로 신 등은 엎드려 명령을 받들고 정벌하러 나갔으나, 지리가 험하고 성이 견고하여 오랫동안 평정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겨울 10월부터 성 서남쪽에 흙과 나무를 쌓아 올려 산을 만들고, 포차(砲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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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같은 것을 멀리 날려 보내는 장치를 한 수레
를 그 위에 줄지어 세워두고 큰 돌을 날리니 부딪치는 곳은 다 무너졌습니다. 계속해서 크게 공격하니 성문과 성가퀴가 모두 부서졌습니다. 그리고 금년(1136) 2월 19일 새벽을 기하여 몰래 군사를 출동시켜 쳐들어가니 적은 달아나고 저항하지 못하였습니다. 역적들이 거짓으로 칭하였던 원수(元帥) 최영(崔永)
과 죽은 부원수(副元帥) 조광(趙匡, ?~1136)의 시체를 묶고 성을 나와 항복하므로, 신 등은 성으로 들어가 성 안을 정리하고 군사들과 백성들을 안심시키고 위로하였습니다. 왕의 군사는 정벌은 있으나 전쟁은 없는 것이니, 하늘의 위엄이 미치는 곳은 그날로 누그러지는 것입니다. 중하(中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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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듣자오니, 후한의 광무제(光武帝)가 외효(隗囂)를 쳐 3년 만에 이겼고, 당나라 덕종(德宗)은 이희열(李希烈)을 토벌하여 4년 만에 평정하였습니다. 저 무지한 간흉(姦兇)이 우리 성읍을 점령하여, 죄는 이미 맹수보다 더하고 악은 언덕과 산만큼 쌓여 있었는데, 오직 폐하의 슬기로운 계책에 실수가 없으시어 1년 만에 이처럼 이겼습니다. 몰래 성을 넘어 병사들을 배치하고 성문을 공격하였으며, 군사가 싸우기 시작하자 적은 이미 기운을 잃으므로, 보병(步兵)과 기병은 용맹을 떨치어 번개같이 공격하고 호통치며 앞으로 나아가니 파도가 무너지듯 했습니다. ……(중략)…… 죄가 무거워 스스로 면하지 못할 줄 아는 자는 식구들과 함께 불에 타 죽고, 비겁하여 결단을 못하는 자는 처벌을 달게 여겨 포로가 되었으니, 오랫동안의 근심이 하루아침에 완전히 해소되었습니다.
이에 회서(淮西)에 들어가 성상(聖上)의 뜻을 선포함에 마치 거꾸로 매달렸다 풀려난 것과 같이 여겼고, 장안(長安)을 회복하여 위로하니 유민(遺民)들이 모두 “이제 돌아와 살아야겠다” 하였으니, 어찌 시전(市廛)만이 변하지 아니했겠습니까? 우뚝한 성궐(城闕)도 그대로 보존되었고 반란군은 이미 제거되었으며 피비린내도 깨끗하게 씻겼습니다. 드디어 이궁(離宮)의 먼지를 청소하고 원묘(原廟)
종묘 외에 따로 세운 별묘(別廟). 고려 시대에는 경령전(景靈殿)을 가리킨다.
의 의관(衣冠)을 우러러보니, 선왕의 위패를 모신 자리는 완연하고 백성들은 춤추고 뛰놀며 앞을 다투어 웃음과 노래로 서로 어울리며 이르기를 “오늘 다시 국왕의 은혜를 입는 백성이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하옵니다. 이는 성상 폐하께옵서 천지의 항상 살게 하는 것을 본받으시고 신기한 무기를 쓰셔서 죽이지 아니하시니, 삼령(三靈)
천(天), 지(地), 인(人)의 신(神)들
이 복을 내리고 사해가 정성을 바치어 번개처럼 치고 바람같이 달려 전쟁을 마무리하셨고, 냇물이 흐르고 산이 솟아서 진실로 만세의 안녕을 연 것이옵니다. 신 등은 폐하의 뛰어난 계책을 받들어 나아가 군기(軍紀)를 담당하였지만 이는 폐하의 큰 은혜에 힘입어 결단하였을 뿐이었습니다. 신이 장수의 재목이 아닌지라 빨리 해결하지 못해 부끄러우나 춤추고 기뻐하는 마음은 평소보다 만 배나 더하옵니다.『동문선』권44 「표전」 평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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