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종
24년 8월) 정축(丁丑)에 왕이 보현원(普賢院)에 행차하고자 하여 오문(五門) 앞에 이르러 시종하는 신하들을 불러 술을 나누었다. 술자리가 무르익자 좌우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이곳은 병법을 연습하기에 좋은 곳이로구나”라고 하고, 무신에게 명하여 오병수박희(五兵手搏戱)를 하게 하였다. 어두워지자 어가(御駕)가 보현원에 가까이 왔을 때 이고(李高, ?~1171)가 이의방(李義方, ?~1174)과 함께 먼저 가서 왕명이라 속이고 순검군(巡檢軍)을 집합시켰다. 왕이 보현원 문에 들고 군신(群臣)이 물러날 무렵에 이고 등이 임종식(林宗植, ?~1170)⋅이복기(李復基,?~1170)⋅한뢰(韓賴) 등을 죽였다. 국왕을 호종(扈從)한 문관과 대소 신료 및 환관이 모두 해를 입었다. 또 개경
에 있는 문신 50여 명을 죽인 후, 정중부(鄭仲夫, 1106~1179)
등이 왕을 환궁(還宮)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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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부(鄭仲夫, 1106~1179)' 관련자료
9월 초하루 무인일 해가 질 무렵에 왕이 강안전(康安殿)으로 들어왔는데 정중부
등이 또 왕을 수행한 내시 10여 명과 환관 10명을 찾아 죽였다. 이때 왕은 수문전(修文殿)에 앉아서 태연히 술을 마시면서 영관(伶官)
가 왕을 협박하여 군기감(軍器監)으로 옮기고 태자는 영은관(迎恩館)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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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사
들에게 음악을 연주하게 하고 밤중이 되어서야 잠들었다. 이고, 채원(蔡元, ?~1172) 등이 왕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양숙(梁淑)이 이를 저지하였다. 순검군이 창문과 벽을 뚫고 왕실 창고에 있던 보물들을 훔쳤다. 정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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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일에 왕은 홀로 거제현(巨濟縣)으로 쫓겨났으며 태자는 진도현(珍島縣)으로 추방되었다. 이날 정중부
, 이의방, 이고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왕의 아우인 익양공(翼陽公) 왕호(王晧)를 맞아다가 왕위에 앉혔다. 그 후 명종(明宗)
3년(1173) 8월에 김보당(金甫當)이 사람을 시켜 왕을 경주
에 나와 살게 하였는데, 10월 경신일에 이의민(李義旼. ?~1196)이 곤원사(坤元寺)의 북쪽 연못가에서 왕을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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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권19, 「세가」19 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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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시(內侍) 김돈중(金敦中)이 나이는 어리지만 기백이 대단하여 촛불로 정중부
의 수염을 태우니 정중부
가 그를 치고 모욕을 주었다. 김돈중의 아버지 김부식(金富軾)
이 노하여 왕께 아뢰어 정중부
를 곤장 치고자 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그러나 정중부
의 사람됨을 남다르게 여겨 몰래 도망시켜 피하도록 하였는데, 정중부
는 이로 말미암아 김돈중을 싫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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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군 이소응(李紹應)은 무인이기는 하나 얼굴이 수척하고 힘도 약하여 어떤 사람과 수박희(手搏戱)를 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달아났다. 한뢰가 갑자기 앞으로 나서며 이소응의 뺨을 때리자 이소응이 섬돌 아래로 떨어졌다. 왕과 모든 신하가 손뼉을 치면서 크게 웃었으며 임종식과 이복기도 이소응을 모욕했다. 여기에서 정중부
와 김광미(金光美), 양숙, 진준(陳俊) 등의 얼굴빛이 변하며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정중부
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한뢰를 힐난하여 말하기를 “이소응은 무관이나 벼슬이 3품인데 어째서 이처럼 심한 모욕을 하는가!”라고 하니 왕은 정중부
의 손을 잡고 달래서 말렸다. 이때 이고가 칼을 뽑고 정중부
에게 눈짓하였으나 정중부
가 그것을 중지시켰다. 날이 저물어 일행이 보현원에 거의 도착하자 이고와 이의방이 먼저 가서 왕의 명령이라 속이고 순검군을 모아 두었다. 그리고 왕이 문에 들어가고 모든 신하가 물러 나올 때 이고 등이 직접 임종식과 이복기를 문에서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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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권128, 「열전」41 [반역2] 정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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