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후(金允侯, ?~?)
는 고종
때 사람이다. (그는) 일찍이 승려가 되어 백현원(白峴院)에 살았는데 몽골병이 오자 처인성(處仁城)으로 난을 피하였다. 몽골의 원수(元帥) 살리타이[撒禮塔, ?~1232]가 쳐들어와서 처인성을 공격하자 김윤후
가 그를 활로 쏴 죽였다. 왕이 그 공을 가상히 여겨 상장군(上將軍)
는 공을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여 말하기를, “싸울 때를 당하여 나는 활과 화살이 없었는데 어찌 감히 헛되이 무거운 상을 받으리오” 하고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이에 (훨씬 낮은 계급인) 섭낭장(攝郞將)으로 고쳐 제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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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군 6위 곧 8위에 딸린 으뜸 장수
을 제수하였으나, 김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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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 (그는) 충주산성 방호별감(忠州山城 防護別監)이 되었다. 몽골병이 와서 성을 포위한 지 무릇 70여 일 만에 군량미가 거의 다 떨어졌다. 김윤후
가 사졸을 설득하고 독려하여 말하기를, “만일 힘써 싸울 수 있다면 귀천(貴賤)을 가리지 않고 모두 관작을 제수할 것이니 너희들은 불신하지 말라” 하였다. 드디어 관청 소속 노비들의 명부를 가져다 불살라 버리고 또 빼앗은 소와 말을 나누어 주니 사람들이 다 죽음을 무릅쓰고 적진에 나아갔다. 몽골병의 기세가 꺾여 드디어 다시 남쪽으로 내려오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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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으로 (그는)감문위(監門衛)
고려 시대 6위의 하나로 궁성을 경비하던 군대
상장군 벼슬을 받았고, 그 나머지 군공이 있는 자는 관노(官奴), 백정(白丁)에 이르기까지 또한 차등을 두어 관작을 주었다.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
동북면병마사
(東北面兵馬使) : 동북면 지역의 군사와 일반 행정 기능을 동시에 담당한 최고 사령관
가 되었지만 그때 동북면(東北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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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함경도
은 이미 몽골이 차지하였으므로 부임하지 못하였다. 관직이 수사공(守司空)우복야(右僕射)
상서성에 속한 정2품
에 이르렀으나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다.『고려사』권103, 「열전」16 [제신] 김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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