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서(朴犀, ?~?)는 죽주(竹州)
18년(1231)에 서북면병마사
로 임명되었다. 몽골 원수(元帥) 살리타이가 철주(鐵州)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사람이다. 고종
'고종' 관련자료
'병마사' 관련자료
평안북도 철산군
를 짓밟은 후 귀주(龜州)
평안북도 구성시 구성
에 다다르자 박서는 삭주 분도장군(朔州分道將軍) 김중온(金仲溫)과 정주 분도장군(靖州分道將軍) 김경손(金慶孫, ?~1251) 및 정주⋅삭주⋅위주⋅태주 등의 수령들과 함께 각기 군사를 인솔하고 귀주로 모였다. 박서는 김중온 부대에게 성의 동서쪽을, 김경손 부대에게 성의 남쪽을 지키게 하고, 도호별초(都護別抄)와 위주⋅태주 별초(別抄) 250여 명을 세 방면으로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 몽골군이 성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고 밤낮으로 서⋅남⋅북문을 공격하였지만, 성 안의 군사들이 적을 기습 공격해 승리하였다. 몽골군이 위주부사(渭州副使) 박문창(朴文昌)을 생포해 성 안으로 보내 항복을 권유하자 박서가 그의 목을 베어 죽였다. 또 몽골군이 정예 기병 300명을 선발하여 북문을 공격하였으나 박서가 싸워서 적을 물리쳤다. 몽골군이 누거(樓車)
망루를 설치하여 적의 성이나 진지를 내려다볼 수 있게 만든 큰 수레
와 큰 평상을 만들어 쇠가죽으로 싸고 그 속에 병사들을 감추어 성 밑까지 와서 굴을 파고 성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였다. 박서가 성 안에서 굴을 뚫고 끓는 쇳물을 부어 누거를 불태우니 땅이 꺼져 몽골군 30명이 깔려 죽었다. 그리고 썩은 이엉(茨)에 불을 붙여서 평상을 불태우니 몽골군이 놀라 우왕좌왕하다 흩어졌다. 몽골군이 또 대포차(大砲車) 15문으로 성의 남쪽을 공격해 상황이 급박해지자, 박서는 성 위에 높이 대(臺)를 쌓고 그 위에서 포차(砲車)
성에 고정시켜 돌 등을 메달아 성 밖으로 날리는 석포에 바퀴를 달아 기동성을 살린 공격용 무기
로 돌을 쏘아서 적을 물리쳤다. 몽골군이 이번에는 섶에 사람의 기름을 적시어 잔뜩 쌓아놓고 불을 질러 성을 공격하였다. 박서는 물로 그 불을 끄려 했으나 더 불타오르자, 군사들에게 진흙을 가져오게 하여 그것을 물에 풀어서 뿌리니 불길이 꺼졌다. 몽골군이 수레에다 건초를 싣고 여기에 불을 질러 성 문루(門樓
성문 위에 지은 다락집
를 공격하였다. 그러자 박서가 미리 준비해 두었던 물을 망루 위에서 뿌리니 불이 곧 꺼졌다. 이와 같이 몽골군이 30일 동안 성을 포위하면서 온갖 방법으로 공격하였음에도 박서가 임기응변으로 굳게 막아내자 몽골군이 이기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다시 북계(北界)의 여러 성의 병력을 강제로 몰고 와서 포차 30문을 늘어놓고는 공격하여 성곽 50칸(間)을 부수었다. 박서는 무너진 성벽을 곧바로 수리하고 또 쇠줄로써 막아버리니 몽골군이 다시는 감히 공격하지 못하였으며, 박서가 나가서 싸우자 크게 이겼다. 몽골군이 또다시 대포차로 공격하자 박서도 포차로 돌을 날려 적군을 무수히 죽이니, 몽골군이 퇴각해 목책을 세우고 그 안에서 수비하였다.
살리타이가 고려 사람인 통역 지의심(池義深)과 학록(學錄) 강우창(姜遇昌)을 귀주로 보내어 항복을 권유하는 회안공(淮安公) 왕정(王侹, ?~1234)의 글을 전하였으나 박서는 듣지 않았다. 살리타이가 다시 사람을 보내 설득해도 박서는 굳게 지키면서 항복하지 않았다. 몽골군이 또다시 운제(雲梯)
구름사다리
를 만들어 성을 공격하자 박서가 대우포(大于蒲)로 맞서 싸워 모조리 부셔 버리니 사다리가 접근할 길이 없었다. 대우포란 것은 큰 칼날이 장착된 거대한 무기이다. 이듬해에 왕이 후군 지병마사
(知兵馬使)⋅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최임수(崔林壽)와 감찰어사(監察御使) 민희(閔曦)를 파견해 몽골 사람을 이끌고 귀주성 밖에 가 “조정에서 이미 회안공 왕정을 파견하여 몽골군과 강화하였고 우리 3군도 이미 항복하였으니 전투를 그만두고 나와서 항복하라”고 설득하게 했다. 여러 차례 설득했지만 박서가 그래도 항복하지 않자 민희는 박서의 고집에 격분하여 자기 칼로 자신의 목을 찌르려 하였다. 최임수가 다시 설득하자 그제야 박서 등도 왕명을 어기기 어려워 비로소 항복하였다. 그 후에 몽골 사신이 와서 박서가 성을 굳게 지키며 항복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죽이려 하자 최우
가 박서에게 말하기를 “그대의 국가에 대한 충성과 절개는 비할 바 없으나, 몽골의 말도 두려운 일이니 그대는 잘 생각해 처신하라”고 하였다. 이에 박서는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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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이 귀주를 포위하고 있을 때 몽골군 중에서 70세에 가까운 늙은 장수가 있었는데, 그가 성과 보루, 병기를 자세히 돌아보고 탄식하기를 “내가 성인이 된 후 군대에 들어와 천하의 각종 성지(城池)에 대한 공방전을 무수히 보았으나 이처럼 맹렬하고 오랜 공격을 당하면서도 끝내 항복하지 않은 곳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이 성을 굳게 지킨 여러 장수들은 후일에 반드시 장군이나 재상이 될 인재들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과연 박서는 후에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
중서문하성의 정2품 관직
에 임명되었다.『고려사』권103, 「열전」16 [제신] 박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