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중손(裴仲孫, ?~1271)은 원종
때 여러 관직을 거쳐 장군에 이르렀다. (원종
) 11년에 수도를 개경(開京)
으로 다시 옮기면서 방(榜)을 붙여 일정한 기일 내에 모두 돌아가라고 재촉하였는데, 삼별초(三別抄)
가 딴 마음이 있어 복종하지 않았다. 그때 왕이 장군 김지저(金之氐)를 강화로 보내서 삼별초
를 해산하고 그 명단을 작성해 가지고 돌아오게 하였더니 삼별초
는 그 명단이 몽골에 알려질 것으로 우려하고 나라를 배반할 마음이 더욱 굳어졌다.
'원종' 관련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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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경(開京)' 관련자료
'삼별초(三別抄)' 관련자료
'삼별초' 관련자료
'삼별초' 관련자료
배중손은 야별초 지유(指諭) 노영희(盧永禧) 등과 반란을 일으키고 도성(강화) 거리로 사람들을 파견하여 “몽골의 대병이 침입하여 백성을 살육하니 나라를 도우려는 사람들은 모두 다 구정(毬庭)으로 모여라!”라고 외치게 하였다. 순식간에 서울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그 중에는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거나 앞다투어 배를 타고 물을 건너다 빠져 죽은 사람도 많았다. 삼별초
는 사람들의 왕래를 금지하고 강 주변을 순찰하면서 외치기를 “양반으로서 배에서 내려오지 않는 자는 모조리 죽인다”라고 하니 듣는 사람이 모두 무서워서 배에서 내렸다. 배를 띄워서 개경
으로 향하려는 자가 있었으나 적(=삼별초
)이 작은 배를 타고 추격하며 활을 쏘았으므로 모두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삼별초' 관련자료
'개경' 관련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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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안 사람들은 놀라서 숲과 풀숲으로 흩어져 숨었으며 아녀자들이 곡하는 소리가 거리에 가득 찼다. 삼별초
는 금강고(金剛庫)의 병기를 꺼내서 군졸들에게 나누어 주고 성을 굳건히 지켰다. 배중손과 노영희는 삼별초
를 이끌고 시랑(市廊)에 모여서 승화후(承化侯) 온(溫)을 협박하여 왕으로 삼고 관부를 설치했는데 대장군 유존혁(劉存奕)과 상서좌승(尙書左承)
'삼별초' 관련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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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상서성 종3품 벼슬
이신손(李信孫)을 좌우 승선으로 임명하였다. ……(중략)…… 적은 진도(珍島)로 들어가서 근거지로 삼고 인근 고을들을 노략질하였으므로 왕이 김방경(金方慶, 1212~1300)
에게 명령하여 토벌케 하였는데 이듬해 김방경
은 몽골 원수 흔도(忻都) 등과 함께 3군을 통솔하고 적을 격파하였다. 적은 모두 처자를 버리고 멀리 도망쳤으며 적장 김통정(金通精, ?~1273)은 패잔병을 거느리고 탐라(耽羅)로 들어갔다.
'김방경(金方慶, 1212~1300)' 관련자료
'김방경' 관련자료
『고려사』권130, 「열전」43 [반역4] 배중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