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고려 시대정치반원 자주 개혁

이색의 시무상소

공민왕 1년(1389)에 이색(李穡, 1328~1396)은 상중에 있으면서 상서하기를 “상중(喪中)에 있는 신(臣) 색이 말씀드립니다. 저는 들으니 ‘나라가 무사할 때는 공경(公卿)의 말도 기러기 털보다도 가벼우나, 나라에 사고가 생기면 평범한 사람의 말도 태산보다도 무겁다’고 합니다. 저는 미천한 필부로서 당돌하게도 감히 말씀을 드리니 그 무분별한 행동에 대한 죄는 용서받을 수 없는 바입니다. 그러나 물 한 방울과 티끌같이 미미한 것도 높은 산과 깊은 바다를 이루는 바탕이 되며, 소를 먹이는 목동과 나무하는 사람 같은 하찮은 사람의 말도 성인(聖人)은 들을 것이 있다고 하니, 만일 전하께서 제가 드리는 말씀을 받아들여 주신다면 종묘와 사직에 큰 다행이라 할 것입니다. ……(중략)……

제가 듣건대 전하는 부처를 숭배하는 정성이 역대 어느 임금보다도 돈독하다 하시니, 나라의 복이 영원하도록 비는 것은 매우 훌륭한 일입니다. 그러나 저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부처는 지극히 성스럽고 공정하여, 극진히 받든다고 하여 기뻐하거나 소홀이 대한다고 해서 노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물며 그 경전에는 분명히 ‘보시하여 공덕을 쌓는 것보다는 경전을 가지고 다니면서 그 말씀을 외우는 편이 낫다’는 말이 있습니다. 전하께서 나랏일을 살피시거나 쉬시는 틈틈이 방등(方等)에 주목하시거나 돈법(頓法)에 유의하시든지 다 안 될 것이 없습니다. 다만 사람들은 윗사람의 행동을 잘 모방하므로, 윗사람이 재물을 낭비하면 아랫사람들도 똑같이 행동하게 되는 법이니, 폐해가 커지기 전에 미리 방지하는 데 신중해야만 합니다. 공자가 ‘귀신은 공경하면서 멀리할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저는 부처에게도 역시 이렇게 대하시기를 바랍니다. 저 또한 전하의 심기를 거스른다면 틀림없이 생명을 잃게 될 것을 모르는 바 아닙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보잘 것 없는 작은 일이라도 잘못하면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오므로, 만 번 죽음을 무릅쓰고 한 마디 말씀을 올리는 것입니다.

제가 다시 생각해보건대 나라의 융성과 쇠퇴가 서로 관련된다는 것은 필연적인 이치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2대에 걸쳐 어린 임금이 즉위하시고 신하가 정권을 잡은 탓에 국가 규율과 질서가 해이해져 사람들이 좋은 세상을 그리워하고 있었습니다. 전하께서는 총명하시고 관대하시며 강인하셔서 가히 나라를 잘 다스리실 수 있는 자질을 갖추셨는데, 지금 나라가 매우 어지러워 백성들이 잘 다스려짐을 그리워하고 있으므로 가히 나라를 잘 다스릴 만한 시기입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어진 사람의 등용을 목마르듯 해야 하는데 아직 어진 사람을 초빙하는 데 쓸 예물을 마련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또한 국정(國政)을 보살피기에 바빠야 할 것인데 아직 궁궐 안의 횃불이 밤에도 켜진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이러하니 어진 사람과 유능한 사람이 어찌 남김없이 등용되었으며, 간악하고 부정한 자들이 어찌 모조리 제거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아직까지 한 가지 정책도 실시되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으며 부질없이 백성을 실망시키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고도 나라가 잘 다스려지기를 바라는 것은, 뒷걸음치면서 앞으로 나아가려는 것과 같고 수레 머리를 남쪽으로 향해 놓고 북쪽의 연경(燕京)으로 가려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참으로 전하를 위하여 부끄럽게 여기는 바입니다. 『주역(周易)』 에 이르기를 ‘하늘의 운행은 한결같이 힘차니, 군자(君子)도 이와 같이 스스로 노력해 쉬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정신 수양의 요체와 치적(治績)을 올리는 방법으로 이만한 게 없으니 전하께서는 마음 속에 새겨두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중략)……

(공민왕 5년) 시정(時政)에 대한 8개 항목을 적어 국왕에게 바쳤는데, 그 하나는 정방(政房)을 폐지하고 이부와 병부가 관리를 선발하는 제도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왕이 그의 건의를 기쁘게 받아들여 드디어 이색을 이부시랑(吏部侍郞) 겸 병부낭중(兵部郞中)으로 임명해 문무 관리의 선발을 주관하도록 하였다.

『고려사』권115, 「열전」28 [제신] 이색

恭愍元年, 穡服中上書曰, 草土臣穡言. 臣聞, 當國家無事之時, 公卿之言, 輕於鴻毛, 及國家有事之後, 匹夫之言, 重於太山. 臣以匹夫之賤, 冒進敢言, 狂妄之罪, 宜在不宥. 然涓埃之微, 高深所資, 蒭蕘之言, 聖人所取, 儻蒙殿下曲賜採擇, 宗廟幸甚, 社稷幸甚. ……(中略)……

臣聞, 殿下奉事之誠, 尤篤於列聖, 其所以祈永國祚者, 甚盛甚休. 然以臣之愚竊惟, 佛者, 至聖至公, 奉之極美, 不以爲喜, 待之甚薄, 不以爲怒. 况其經中, 分明有說, 布施功德, 不及持經. 聽政之餘, 怡神之暇, 注目方等, 留心頓法, 無所不可. 但爲上者, 人所則效, 虛費者, 財所耗竭, 防微杜漸, 不可不愼. 孔子曰, 敬鬼神而遠之, 臣願於佛, 亦宜如此. 臣亦知逆鱗必至於碎首, 但恐濫觴或至於滔天故, 冒萬死, 不惜一言.

臣又復思惟, 盛衰相因, 理之必然. 我國家, 再世幼冲, 陪臣執權, 紀綱失墜, 人思其治. 殿下以聰明寬毅, 可以有爲之資, 當亂極思治, 可以有爲之時. 宜渴於用賢矣, 未見束帛戔戔. 宜急於聽政矣, 而未見庭燎晰晰. 賢能, 豈盡登庸, 姦邪, 豈盡屛退. 未聞一政之行, 徒觖百姓之望. 如此而望其治成, 是猶却步而圖前, 南轅而適燕, 臣甚爲殿下恥之. 易曰, 天行健, 君子以自强不息. 修心之要, 出治之方, 無過於此, 惟殿下留心焉. ……(中略)……

(恭愍王 五年)上書言時政八事, 其一, 罷政房, 復吏兵部選也. 王嘉納, 遂以穡爲吏部侍郞兼兵部郞中, 以掌文武之選.

『高麗史』卷115, 「列傳」28 [諸臣] 李穡

이 사료는 이색(李穡, 1328~1396)이 1352년(공민왕 1년) 부친의 상중에 있으면서 고려의 정치 개혁 방향을 정리하여 올린 상서문 중 일부이다. 이색공민왕(恭愍王, 재위 1351~1374)과 함께 개혁을 주도하기도 하고, 성균관의 총책임자가 되어 고려 말의 학문을 이끌기도 하였다. 그는 고려 말과 조선 초기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문장가이면서 새 왕조를 창건하자는 이성계(李成桂, 1335~1408)의 제의를 거절하고 절의를 지킨 포은 정몽주(鄭夢周, 1337~1392)야은 길재(吉再, 1353~1419)와 더불어 삼은(三隱) 중 한 명이었다.

고려 말 당시의 지배층인 권문세족에 도전하여 새롭게 신진 사대부가 성장하였다. 이들은 향리의 자제 출신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중앙의 관리가 되었다. 이들은 이미 중앙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권문세족과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이색도 역시 신진 사대부 출신이다. 이색의 집안은 대대로 한산에서 호장직을 지냈지만 아버지 이곡(李穀, 1298~1351)이 원나라 과거 시험에서 2등을 한 이후 한림국사원 검열관(翰林國史院 檢閱官)이라는 벼슬에 올랐고, 그 뒤 고려의 중앙 정계에 진출하였다. 이색은 14세 때 진사시에 합격한 뒤 명문가인 권중달의 딸과 결혼하였다. 이로써 이색은 아버지, 처가 등 양쪽에 튼튼한 기반을 갖게 되었고, 이는 여느 신진 사대부들과 달리 보수적인 입장에 서는 이유가 되기도 하였다.

이색은 20세 되던 해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원나라에 갔다. 천하의 중심임을 자처하던 원나라 수도에서 새로운 문물과 사상을 접하며 국자감 생원이 되어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이러한 원나라와의 인연은 훗날 명나라 사대를 주장하던 신진 사대부들과 달리 원나라를 지지하는 배경이 되었다.

원나라에서 공부하던 이색은 28세가 되던 해에 귀국하여 공민왕이 이끄는 개혁의 실무 관료가 되었다. 이색정방(政房)을 혁파하자는 상소를 올린 후 공민왕의 신임을 얻어 문무 인사권을 장악하였고, 그 무렵 시행되던 과거 시험의 책임자가 되어 교육과 과거 제도의 개혁을 이끌었다. 또한 토지 제도 운영에서 발생하는 불법과 비리를 척결하자고 주장하였다.

한편 그는 불교와 유교가 하나도 다른 것 없이 궁극에는 같은 진리인데 이름만 달리하였다며 불교 개혁도 주장하였지만, 불교 자체는 존중하면서 불교에서 파생되는 여러 폐단에 대한 시정만 요구하였을 뿐이다. 불교도 수가 늘어났지만 오교양종(五敎兩宗)은 명리를 구하는 소금이 되었으며, 큰 냇가와 깊은 산골에 절이 없는 곳이 없을 지경이 되었다. 그는 도첩제를 실시하여 승려가 되는 길을 제한하고 새로운 절을 세우는 것을 금지하자고까지 주장하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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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우왕대 이색의 정치적 위상에 대한 연구」,『역사와 현실』68,이익주,한국역사연구회,2008.
저서
『목은 이색의 정치사상 연구』, 도현철, 혜안, 2011.
편저
「신흥사대부의 대두」, 김윤곤, 국사편찬위원회, 1974.
『목은 이색의 생애와 사상』, 목은연구회, 일조각,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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