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왜변이 일어나면서부터 날로 쇠퇴하다가 신유년에 와서는 그 화가 더욱 맹렬하여 성읍(城邑)이 빈 터가 되고 살림집들이 불타 없어졌다. 그 결과 수년간 버려져 왜적들의 소굴이 되고 관리들은 다른 고을에 몸을 맡겨야 했으며 범과 멧돼지가 옛 마을로 내려와 살게 되었다. 변방의 방비가 없게 되자 왜적이 더욱 깊이 들어와 계해년 여름에는 원주⋅춘천을 거쳐 철원의 경계까지 침범하였고, 양주(楊州)⋅광주(廣州)에 침입하였으며 공주(公州)의 수령을 살해하였다. 그 왜적들이 모두 여기 축산도(丑山島)를 통해 들어왔으니, 한 고을이 막지 못해 세 도(道)가 화를 입었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것은 바로 이런 참혹함이다.
이듬해 갑자년에 윤가관(尹可觀, ?~1387)이 합포(合浦)에서 나와 바다를 따라 북쪽으로 가다가, 이곳에 와서는 무기를 가시덤불 속에 세우고 둘러보다 세 번 감탄하고는 여기에 성을 쌓아 변경의 방어를 굳게 하기로 마음 먹고 곧바로 역로(驛路)를 통해 조정에 알렸다. 조정에서는 좋다고 여기면서도 수령을 보낼 일이 걱정이었는데, 김을보(金乙寶)가 자청하고 나서므로 부인(符印)
위임장과 도장
을 주어 많은 장정들을 부리도록 하였다. 그러자 그는 계림(鷄林)과 안동(安東)의 사졸(士卒) 2000명을 징발하여, 왜적 떼가 출몰하는 와중에 한편으로 방어하고 한편으론 성을 쌓아 7월에 시작하여 열흘 만에 끝내고, 또한 축산도(丑山島)에 배를 정박하고 방수(防戍)를 설치하니 그 후에는 왜적들이 이곳에 배를 댈 수 없었다. 이처럼 한 고을이 다시 형성되고 여러 고을이 편안해진 것은 모두 윤공이 성을 쌓게 한 덕분이었다. 이때부터 떠돌던 사람들이 점차 돌아오고 백성들의 거처가 대략 세워졌는데, 무진년 정월에 실수로 불타 버려 공사(公私)의 집이 세워지지 못하였다. 기사년 봄에 병마사(兵馬使)
박문부(朴文富)가 부임하여 남은 백성들을 측은히 여기며 관대한 정사를 힘써 행하여, 생업을 잃고 이사 간 백성들을 맞아들이고 사도(私度)
'병마사(兵馬使)' 관련자료
사사로운 도첩(度牒)
를 받아 승려가 된 아전들을 환속시켜 그들의 고단함을 풀어 주고 굶주림을 구제하여 온정을 베풀어 어루만지기를 어린애 돌보듯이 하였다. 이 해에 왜구
들이 다시 와 밤에 해안가에 정박하였는데, 박문부가 이 소식을 듣고는 바로 성문을 열고 말을 채찍질하여 나갔다. 좌우에서 모두들 “왜적들이 어두운 밤을 노리고 쳐들어왔으므로 어떤 상황이 발생할 지 모르는데, 우리 쪽은 약하여 왜적을 부수기 쉽지 않으니 차라리 성벽을 굳게 지키며 기다리는 쪽이 최선일 것입니다”고 하였다. 박문부가 말하기를 “나라에서 나를 부족하게 여기지 않고 이 지방을 맡겨 백성들을 위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도록 하였으니, 바닷가에서 소금을 굽는 하찮은 백성들도 나라의 귀한 백성이 아니겠는가. 적이 쳐들어왔다는 사실을 듣고도 구하지 않아 그 공격을 받게 한다면, 내가 비록 구차하게 살아남은들 장차 어찌 죄를 면할 것인가. 달려가 싸우다 죽는 것이 곧 나의 직책이다. 또 내가 돌격하여 나가면 왜적들도 반드시 두려워할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는 병사들보다 앞서 왜적을 향해서 달려가니 적들은 과연 도망쳐 달아났다. 그가 백성들에게 인자하고 적에게 용감함이 이러하였으니, 고을 사람들의 유임(留任)하기 바라는 소망과 관찰사의 공을 포상하는 추천을 얻음은 당연한 일이다.
'왜구' 관련자료
『양촌집』권11 「기류」 영해부서문루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