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우(辛禑) 6년(1380) 경신 8월, 왜적의 배 500척이 진포(鎭浦)에 배를 매어 두고 하삼도(下三道)에 들어와 노략질하였다. 바닷가의 주군(州郡)을 도륙하고 불살라서 거의 다 없어지기에 이르렀으며, 인민을 죽이고 사로잡은 수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고 시체가 산과 들판을 덮었다. 왜적의 배로 운반하다 땅에 버려진 곡식 두께가 한 자[尺] 정도였다. 잡아들인 자녀를 죽인 것이 산더미처럼 쌓여 그들이 지나간 곳은 피바다를 이루었다. 왜적들이 2, 3세 되는 계집아이를 사로잡아 머리를 깎고 배[腹]를 갈라 깨끗이 씻어서 쌀⋅술과 함께 하늘에 제사 지내니, 하삼도의 연해 지방이 쓸쓸하게 텅 비게 되었다. 왜적이 침입한 이후 이 같은 일은 일찍이 없었다.
우왕
은 태조
를 양광(楊廣)⋅전라⋅경상 3도의 도순찰사(都巡察使)로 삼아 왜적을 정벌하게 하였다. 찬성사(贊成事) 변안열(邊安烈)을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삼아 부장(副將)으로 하고, 평리(評理) 왕복명(王福命), 평리 우인열(禹仁烈), 우사(右使) 도길부(都吉敷), 지문하(知門下) 박임종(朴林宗), 상의(商議) 홍인계(洪仁桂), 밀직(密直) 임성미(林成味), 척산군(陟山君) 이원계(李元桂)를 원수(元帥)로 삼았다. 모두 태조
의 지휘를 받게 하였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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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관련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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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적이 상주(尙州)에 들어와서 6일 동안 주연(酒宴)을 베풀고 관청 창고를 불살랐으며, 경산부(京山府)
가 천리 사이에 넘어진 시체가 서로 잇대어 있음을 보고는 이를 가엾게 생각하여 편안히 자거나 밥을 먹지 못하였다. ……(중략)……
현 성주 일대
를 지나서 사근내역(沙斤乃驛)에 주둔하였다. 삼도 원수(三道元帥) 배극렴(裵克廉) 등 9원수가 패전하고, 박수경(朴修敬)⋅배언(裵彦) 두 원수가 전사하였으며 죽은 사졸이 500여 명이었다. 적의 기세가 더욱 강해져 마침내 함양성(咸陽城)도 무너졌으며, 남원으로 향하여 운봉현(雲峰縣)을 불사르고 인월역(引月驛)에 진을 쳤다. 장차 광주(光州)의 금성(金城)에서 말을 쉬게 한 후 북쪽으로 올라가겠다고 큰소리치니 나라 안팎이 크게 동요하였다. 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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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적장이 나이 겨우 15, 16세 되었는데, 골격과 용모가 단정하고 고우면서도 매우 사납고 용맹스러웠다. 흰 말을 타고 창을 마음대로 휘두르면서 달려 부딪치는데 그가 가는 곳마다 쓰러져 감히 대적하는 사람이 없었다. 군사들은 아기발도(阿其拔都)라 부르면서 서로 그를 피하였다. 태조
는 그가 용감하고 날랜 것을 아껴서 두란(豆蘭)에게 명해 사로잡고자 하였다. 두란이 말하기를, “만약 산 채로 잡으려 하면 반드시 사람을 상하게 할 것입니다” 하였다. 아기발도는 갑옷과 투구로 목과 얼굴을 감쌌는데 쏠 만한 틈이 없었다. 태조
가 말하기를, “내가 투구의 정자(頂子)
가 즉시 투구를 쏘아 또 정자(頂子)를 맞히니, 투구가 마침내 떨어졌다. 두란이 곧 쏴서 죽이니, 이에 적군의 기세가 꺾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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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립(戰笠) 등에 꼭지처럼 만든 꾸밈새
를 쏘아 투구를 벗길 것이니 그대가 즉시 쏘아라” 하고는, 드디어 말을 채찍질해 뛰게 하여 투구를 쏘아 정자(頂子)를 바로 맞혔다. 투구 끈이 끊어져 기울어지자 급히 투구를 조정하여 쏘므로 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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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가 앞장서서 힘을 내어 치니, 적들은 쓰러져 흔들렸고 날랜 군사는 거의 다 죽었다. 적군의 통곡 소리가 1만 마리의 소 울음과 같았다. 적군이 말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가자, 관군(官軍)은 이긴 기세를 타서 달려 산으로 올라가서, 기뻐서 고함을 지르고 북을 치며 함성을 질렀다. 함성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켜 사면에서 적들을 크게 쳐부수었다. 냇물이 붉은 피를 이루어 6, 7일 동안이나 빛깔이 변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물을 마실 수가 없어서 모두 그릇에 담아 맑기를 기다려 한참 만에야 물을 마시게 되었다. 말 1600여 필을 얻고 무기(武器)를 얻은 것은 헤아릴 수도 없었다. 처음에 적군이 우리 군사보다 10배나 많았는데 다만 70여 명만이 지리산으로 도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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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실록』총서, 신우 6년 경신 8월
만력(萬曆) 3년(선조 8, 1575)에 전라도 관찰사 박계현(朴啓賢)이 보고하기를 “운봉현(雲峰縣)
께서 왜적을 크게 무찌른 곳입니다. 세월이 오래 지나 지명이 엉뚱하게 바뀌고 길도 잘 알 수 없어 정확한 지점을 분별할 수가 없게 되었으니, 수천 수백 년 후에 높은 산은 평탄해지고 낮은 곳은 메워져 갈수록 더 희미해지면 아무도 그 위치를 모르게 될까 심히 두렵습니다. 큰 돌 하나를 세워 이를 표시하기를 고을의 늙은이부터 어린이에 이르기까지 모두 관청에 하소연하니, 지방을 다스리는 신하로서 감히 보고하지 않을 수 없어 삼가 아룁니다”고 하였다. 왕이 그 건의를 받아들여 전라도에서 그 일을 주관하도록 하고, 이어 신 (김)귀영(金貴榮, 1520~1593)에게 글을 짓도록 명하셨다.
지금의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동쪽 16리 되는 곳에 황산(荒山)이 있는데, 이곳은 바로 우리 태조강헌대왕(太祖康獻大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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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명을 받고 두려운 마음으로 살펴보니, 고려 말에 나라는 갈수록 위태로워졌는데 섬 오랑캐들이 그 틈을 타서 성읍(城邑)을 도륙하고 불태우니, 죽은 시체가 들판을 가득 채우고 지나가는 곳마다 유혈이 낭자하여 모든 산천이 적막하였다. 함양(咸陽) 사람을 모두 죽이고 운봉을 불태운 후 인월(引月)
께서 남원을 출발하셔서 운봉을 넘으시고 황산(荒山)에 이르셨다. 정봉(鼎峰)에 오르셔서 형편을 살피시고는, 날랜 군사들을 앞뒤에서 서로 호응하게 하면서 적을 공격하게 하시어 10배가 넘는 적을 모두 무찌르니, 채 하루도 걸리지 않아 모두 소탕하여 버렸다. 그 후 200여 년간 바다에 아무런 근심이 없고 영남과 호남 지방이 편안한 것은 모두 이때의 전공(戰功) 덕분이니, 남쪽의 백성들이 감사히 여기어 떠받들고 추모하는 마음을 더욱 북돋워 의지하고자 하는 것을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중략)……
지금의 남원시 인월리
에 주둔하면서 말을 배불리 먹여 북쪽으로 진격한다고 떠드니 나라 안팎이 크게 놀라 두려워하였다. 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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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력(萬曆) 5년 정축(선조 10, 1577) 8월 일
조봉대부(朝奉大夫) 행운봉현감(行雲峰縣監) 남원진관병마절제도위(南原鎭管兵馬節制都尉) 겸춘추관기사관(兼春秋館記事官) 신(臣) 박광옥(朴光玉)이 세움.
「황산대첩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