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무선(崔茂宣, 1328~1395)
은 영주(永州)
를 제어함에는 화약만한 것이 없다”라고 하였으나, 국내에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최무선
은 항상 중국 강남(江南)에서 오는 상인이 있으면 곧바로 만나보고 화약 만드는 법을 물었다. 어떤 상인 하나가 대강은 안다고 대답하자, 자기 집에 데려다가 의복과 음식을 주고 수십 일 동안 물어 대강의 요령을 터득했다. 도당(都堂)
이 남을 속이는 자라는 험담까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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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
사람으로 광흥창사(廣興倉使)
관리들의 봉급을 맡아 관리한 관리
최동순(崔東洵)의 아들이다. 천성이 기술에 밝고 방략(方略)이 많으며, 병법(兵法)을 말하기 좋아하였다. 고려 시대 벼슬이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에 이르렀다. 일찍이 말하기를, “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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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 최고 정무기관인 도평의사사의 별칭
에 말하여 시험해 보자고 하였으나, 모두 믿지 않았으며 심지어 최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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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무선
이 여러 해를 두고 건의하니 결국 그 성의에 감동해 화약국(火藥局)을 설치하였다. 최무선
을 제조(提調)로 삼아 마침내 화약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 (중략) (화약이) 완성되자 보는 사람이 모두 놀라고 감탄하였다. 또 전함(戰艦)의 제도를 연구하고 도당
에 말해서 만드는 것을 감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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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신년(1380, 우왕
6년) 가을에 왜선 300여 척이 전라도 진포(鎭浦)
의 화약을 시험해 보고자 하였다. 최무선
은 부원수에 임명되어 도원수 심덕부(沈德符, 1328~1402)⋅상원수(上元帥) 나세(羅世, 1320~1397)와 함께 배를 타고 화구(火具)를 싣고 바로 진포에 이르렀다. 왜구
는 화약이 있는 줄 모르고 배를 한곳에 집결하여 힘을 다하여 싸우려고 하자, 최무선
이 화포를 발사해 그 배들을 다 태워 버렸다. 배를 잃은 왜구
는 육지에 올라와서 전라도와 경상도까지 노략질하고 다시 운봉(雲峯)
를 빠짐없이 섬멸하였다. 이후 왜구
가 점점 줄어들고 항복하는 자가 서로 잇달아 나타나 해안가의 백성들이 생업을 회복하게 되었다. 이는 태조
의 덕에 하늘이 응한 덕분이지만, 최무선
의 공 역시 작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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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군산시
에 침입했을 때 조정에서 최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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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 지역
에 모였다. 이때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로 있던 태조(太祖)
이성계
가 여러 장수와 함께 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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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무선
은) 조선 개국 후에 늙어서 등용되지는 못했으나, 임금이 그 공을 생각하여 검교참찬(檢校參贊)을 제수하였다. 그가 죽자 임금이 슬퍼하여 후하게 부의(賻儀)하였고, 신사년에는 의정부 우정승⋅영성부원군(永城府院君)으로 추증(追贈)하였다. 아들이 있으니 최해산(崔海山, 1380~1443)이다. 최무선
이 임종할 때에 책 한 권을 그 부인에게 주고 부탁하기를, “아이가 장성하거든 이 책을 주라” 하였다. 부인이 몰래 감추어 두었다가 최해산이 15세가 되어 제법 글자를 알게 되었을 때 내주었는데, 곧 화약을 만드는 법이었다. 최해산이 그 방법을 배워서 조정에 쓰이게 되어 지금 군기소감(軍器少監)으로 있다.
'최무선' 관련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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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실록』권7, 4년 4월 19일(임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