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란의 소손녕[소배압(蕭排押)을 말함]이 침략할 때 군사를 10만 명이라 하였다. 당시 강감찬
은 서북면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로 있었는데, 왕이 명하여 상원수(上元帥)를 삼고 대장군 강민첨(姜民瞻)을 부원수로, 내사사인 박종검(朴從儉)과 병부낭중 유참(柳參)을 판관으로 삼아 군사 20만 8300명을 거느리고 영주(寧州)에 주둔하게 하였다.흥화진(興化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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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안북도 의주군 위원면
에 이르러 기병 1만 2000명을 뽑아 산골짜기 안에 병사를 숨기고 큰 줄로 소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큰 개천을 막아서 기다리다가, 적이 이르자 막고 있던 물줄기를 터뜨리고 복병을 일으켜 크게 이겼다. 소손녕이 군사를 이끌고 바로 경성으로 나아가자 강민첨이 추격하여 자주(慈州)
평안남도 순천
내구산(來口山)에 이르러 또 크게 이겼고, 시랑 조원(趙元)이 또 마탄(馬灘)
강원도 화천군 하천
에서 공격하여 1만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이듬해 정월 강감찬
은 거란병이 개경
을 위협하자 병마판관 김종현(金宗鉉)에게 병사 1만 명을 거느리게 하고 급히 개경
으로 들어가 지키게 하고, 동북면병마사
(東北面兵馬使)도 또한 군사 3300명을 보내어 지원하였다. 이때 거란이 군사를 돌려 연주(漣州)
등이 숨었다가 공격하여 500여급을 베었다. 2월에 거란의 병사가 귀주(龜州)를 지나자 강감찬
등이 동교(東郊)에서 맞아 싸우는데 양쪽의 군대가 서로 비슷하여 승패가 결정되지 못하였다. 그런데 김종현이 군사를 끌고 달려오자 갑자기 비바람이 남쪽으로부터 와서 군대의 깃발이 북쪽을 가리켰다. 아군이 기세를 타고 용기백배하여 격렬히 공격하니 거란병이 패하여 달아났다. 아군이 추격하여 석천(石川)을 건너 반령(盤嶺)에 이르니 시신이 들을 덮고 사로잡은 사람⋅말과 낙타⋅갑옷⋅무기를 모두 헤아릴 수 없었다. 살아서 돌아간 자가 겨우 수천 명이니 거란이 패한 것이 이보다 심한 적이 없었다. 거란주(契丹主)1)
가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사자(使者)를 보내어 소손녕을 꾸짖어 말하기를 “네가 적을 무시하고 깊이 들어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무슨 면목으로 나를 보겠는가. 짐이 마땅히 너의 낯가죽을 벗긴 연후에 죽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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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남도 개천
⋅위주(渭州)
평안북도 영변
에 이르자 강감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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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거란족이 세운 요(遼)나라의 6대 황제 성종(聖宗, 971~1031)이다.
강감찬
이 3군을 거느리고 개선하여 빼앗아 온 것을 바치니 왕이 친히 영파역(迎波驛)에서 맞이하여 채붕(綵棚)
의 머리에 꽂아 주고는 왼손으로 손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잔을 잡아 위로하고 감탄하기를 끊임없이 하니 강감찬
이 감사하며 어찌 할 바를 몰랐다. 드디어 역(驛)의 이름을 고쳐 흥의(興義)라 하고 역리(驛吏)에게 관대(冠帶)를 주어 주현리(州縣吏)와 같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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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가지 채색으로 아름답게 꾸민 무대
을 맺고 음악을 준비하여 장사들을 위해 연회를 베풀었다. 금화팔지(金化八枝)를 친히 강감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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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권94, 「열전」7 [제신] 강감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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