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술일에 김방경(金方慶, 1212~1300)
이 정동군(征東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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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벌군
의 선봉대로서 별초(別抄)를 거느리고 첫 출발을 하였다.『고려사』권28, 「세가」28 충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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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10월 을사일에 도독사 김방경
에게 중군을 통솔하게 하고 박지량(朴之亮, ?~1292)⋅김흔(金忻, 1251~1309)을 지병마사
로, 임개(任愷)를 부사(副使)로 임명하고 김선(金侁, ?~1274)을 좌군사(左軍使)로, 위득유(韋得儒, ?~1278)를 지병마사
로, 손세정(孫世貞)을 부사로 임명하고, 김문비(金文庇)를 우군사(右軍使)로, 나유(羅裕, ?~1292)⋅박보(朴保)를 지병마사
로, 반부(潘阜, 1230~?)를 부사로 임명한 후 전체를 삼익군(三翼軍)이라 총칭하였다. 원나라 도원수 홀돈(忽敦), 우부원수 홍다구(洪茶丘, 1244~1291), 좌부원수 유복형(劉復亨)과 함께 몽⋅한군(蒙⋅漢軍) 2만 5000명과 아군 8000명, 뱃사공, 인해(引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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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길의 안내자
, 뱃사람 6700명과 전함 900여 척으로 일본을 정벌하러 출발하였다. 이키시마[一岐島]에 이르러 1000여 명의 적을 죽이고 길을 나누어 진격하니 왜인이 퇴각하여 도주하였는데 죽어 넘어진 시체가 삼대 쓰러진 것처럼 많았으며 날이 저물 무렵에 포위를 풀었다. 그런데 때마침 밤중에 폭풍우가 일어나서 전함들이 바위와 언덕에 부딪치어 많이 파손, 침몰되었고 김선은 물에 빠져 죽었다.『고려사』권28, 「세가」28 충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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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해일에 일본을 정벌하러 갔던 군대가 합포(合浦)
창원⋅마산
에 돌아왔다.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동지추밀원
사(同知樞密院事) : 고려 시대 왕명의 출납, 궁궐의 경호 및 군사 기밀 등을 맡은 종2품 벼슬
장일(張鎰, 1207~1276)을 파견하여 그들을 위로하였는데 이번 전쟁에서 돌아오지 못한 자가 무려 1만 3500여 명이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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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권28, 「세가」28 충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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