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에 다시 원나라에 갔을 때 유청신(柳淸臣)과 오잠(吳潛)이 원나라 정부에 상서하여 우리나라를 한 성(省)으로 만들어 중국 본토에 병합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에 대하여 이제현(李齊賢)
이 원나라 도당(都堂)에 글을 올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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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中庸)』에 이르기를 ‘대저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아홉 가지 원칙이 있지만 그것을 실행하는 목적은 하나이다. 끊어진 왕통을 잇게 하고 망하는 나라를 일으켜 주며 어지러운 것을 다스려주고 위태로운 것을 붙들어 주며, 하사품을 후하게 주고 공물은 적게 받는 것은 바로 제후(諸侯)를 포섭하기 위함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를 설명하는 자가 말하기를 ‘후손이 없는 나라는 계승하게 하고 멸망한 제후들에게 영지를 주어 위와 아래가 서로 편안케 하며 크고 작은 나라들이 서로 돕게 하면 온 천하가 모두 힘을 다하여 왕실을 보위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옛날 제환공(齊桓公)이 떠돌던 형(邢)후를 형 땅으로 이주시키니 그가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여겼으며, 멸망한 위(衛)나라를 위후에게 다시 봉하여 주었더니 그는 자기 나라가 망하였던 것을 알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제환공이 여러 나라를 규합하여 온 천하를 바로잡아 오패(五覇)의 우두머리로 된 이유였습니다. 패자(覇者)도 이렇게 노력할 줄 알았거늘 하물며 세상에서 가장 광대한 지역을 차지하고 온 천하를 한 집으로 만든 분은 어떻겠습니까?
생각건대 저희 나라는 태조
왕씨가 개국한 지 대략 400여 년이며 신하로서 성조(聖朝)를 섬겨 해마다 공물을 바친 것도 100여 년이었습니다. 그동안 나라 백성들에게 입힌 덕이 깊지 않은 바 아니요, 원나라 조정에 세운 공로도 두텁지 않다고 할 수 없습니다. 무인년(1218년)에 요나라 유민이 세운 대요수국(大遼收國)의 아들 금산 왕자(金山王子)가 중국의 백성을 약탈하고 동쪽으로 와서 저희 나라의 섬에 들어가 제멋대로 날뛰니, 태조 성무 황제(太祖聖武皇帝)께서 합진(哈眞)과 찰라(扎剌) 두 원수를 보내 적을 토벌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때마침 큰 눈이 내려 군량을 수송할 수 없게 되자 저희 충헌왕이 조충(趙沖)과 김취려(金就礪)를 시켜 양식과 무기를 보급하니, 아군은 대나무를 쪼개듯이 적을 사로잡고 죽였습니다. 이에 두 원수는 조충 등과 형제의 의를 맺고 영원히 잊지 말 것을 맹세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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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세조 황제께서 강남에서 회군하실 때 우리 충경왕(고려 원종
)이 천명이 세조 황제께 돌아가서 인심을 복속시킬 것을 알고 5000여 리를 거쳐 양초(梁楚) 지방까지 가서 찾아 뵈었고, 충렬왕
역시 직접 조정에 나아가 인사 드리는 일을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또 일본을 정벌할 때는 나라의 모든 국력을 기울이고 선봉에 섰으며, 합단(哈丹)을 추격할 때는 원나라 군대를 도와 적의 괴수를 섬멸하였습니다. 이처럼 황제 폐하를 위해 바친 노력은 일일이 거론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주를 출가시켜 대대로 친밀한 인척 관계를 가졌으며 옛날부터 전해 오는 관습을 고치지 않게 하여 종묘사직을 지키게 하셨으니, 이는 세조 황제께서 내리신 조서 내용에 따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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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들으니 원나라 조정에서 저희 나라에 행성(行省)을 설치하여 중국의 다른 지방과 같은 행정 구역으로 만든다고 합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저희 나라의 공로는 막론하고라도 세조 황제의 조서(詔書)는 어떻게 할 것입니까? 몇 년 전 11월에 황제 폐하께서 새로 내리신 조서의 한 조항에 ‘옳지 못한 것과 올바른 것을 서로 다른 길로 가게 함으로써 나라 안을 편안하게 하여 세조 시대의 정치를 회복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폐하의 조서는 실로 온 세상 사람의 복(福)인데 유독 저희 나라의 일에 대해서만 세조 황제의 조서를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중용』이란 서적은 공자의 문인들이 후대에 교훈을 전한 것으로 결코 헛된 말이 아닙니다. 그 내용을 보면 ‘왕통을 이어준 나라는 내가 또 보살펴 주고 망한 나라는 내가 일으켜 줄 것이며 어지러운 것은 다스리고 위태로운 것은 안정시킨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아무런 이유 없이 조그마한 나라의 400년 왕업을 하루 아침에 단절시켜 나라에 주인이 없게 하고 종묘 제사도 끊어지게 한다는 것은 이치로 따져 보아도 결코 적절하지 않습니다.
다시 생각건대 저희 나라는 땅이 1000리도 되지 않으며 그 중에 산림과 냇가와 연못 등 경작하지 못하는 토지가 10분의 7이나 되어 토지에 세를 부과하여도 운반하는 비용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며 백성에게 조세를 부과하여도 관리의 봉급을 주기에도 부족한 형편이니, 원나라 조정의 재정에 비교한다면 새 발의 피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 더구나 저희 나라는 중국에서 멀고 백성은 어리석은 데다 언어가 중국과 다르며 행동 양식 또한 매우 다르니, 만일 저희 나라에서 이러한 소문을 들으면 반드시 의구심을 품게 되어 집집마다 다니며 타일러도 안심시키지 못할까 걱정됩니다. 또 왜(倭)와는 바다를 두고 마주 보고 있으므로 만일 그들이 이 소문을 듣게 되면 우리의 처지를 거울로 삼아 자신들의 취하여 온 방침이 옳았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바라건대 집사 각하께서는 저희의 공로를 잊지 않은 세조 황제의 의도를 따르시고 『중용』이 후세에 남긴 교훈을 살려, 나라는 그 나라대로, 사람은 그 사람대로 각자 정치와 재정에 힘쓰게 하여 중국을 지키는 울타리로 삼아 저희의 무궁한 기쁨을 계속 누리게 하소서. 이렇게 되면 어찌 삼한(=고려) 백성들만이 집집마다 기뻐하고 황제 폐하의 성덕을 노래할 뿐이겠습니까? 종묘에 모신 영혼들도 지하에서 감격해 울 것입니다.” 마침내 행성을 두자는 논의가 종식되었다.
『고려사』권110, 「열전」23 [제신] 이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