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
이 여러 재상과 함께 정료위(定遼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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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초기 중국 동북 지방을 공략하기 위해 설치한 관서
를 공격할 것인가, 화친을 청할 것인가의 가부를 의논하니, 모두 화친하자는 의논을 따랐다. 당시 요동 도사가 이사경(李思敬) 등을 보내어 압록강을 건너 방을 붙이기를, “호부가 황제의 명을 받드노라. 철령(鐵嶺) 이북⋅이동⋅이서는 원래 개원(開原)의 관할이니 여기에 속해 있던 군민(軍民)⋅한인(漢人)⋅여진⋅달달⋅고려는 종전과 같이 요동에 속한다” 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의논이 있었다. ……(중략)……『고려사절요』권33, 신우 4 무진 14년 2월
공산부원군(公山府院君) 이자송(李子松)을 죽였다. 처음에 최영
이 우왕
에게 권하여 요동을 치려 하니, 이자송이 최영
의 집에 가서 불가하다고 온 힘을 다해 말하였다. 최영
이 그를 (임)견미의 당(黨)에 붙었다는 이유를 들어 곤장 107대를 쳐서 전라도 내상(內廂)으로 귀양 보내기로 하였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죽였다. 자송이 청렴해서 나라 사람들이 다시 재상이 되기를 바랐는데,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슬퍼하고 탄식하였다. 서북면 도안무사 최원지(崔元沚)가 보고하기를, “요동 도사가 지휘(指揮) 두 사람을 보내어 군사 1000여 명을 거느리고 강계까지 와서 장차 철령위(鐵嶺衛)
를 세우고자 요동(遼東)에서 철령까지 역참(驛站) 70곳을 설치했다” 하였다. 우왕
이 동강에서 돌아오다 말 위에서 울며 이르기를, “군신들이 요동을 치려는 나의 계책을 듣지 않아서 이 지경이 되게 하였다” 하고, 드디어 팔도의 군사를 징집하였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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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절요』권33, 신우 4 무진 14년 3월
여름 4월 1일 을사일에 우왕
이 봉주(鳳州)에 머물면서 최영
과 태조(=이성계)
를 불러 이르기를, “요양(遼陽)을 치려 하니 경 등은 힘을 다하라”고 하였다. 태조
가 아뢰기를, “지금 군사를 내는 데 4가지 불가한 것이 있으니,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거슬리는 것이 첫 번째 불가한 것이요, 여름에 군사를 출동시키는 것이 두 번째 불가한 것이요, 온 나라가 멀리 정벌을 하면 왜구
가 빈틈을 타서 침입할 것이니 세 번째 불가한 것이요, 때가 무덥고 비가 오는 시기라서 활에 아교가 녹아 풀어지고 대군이 전염병에 걸리는 일이 네 번째 불가한 것입니다” 하니, 우왕
이 그럴듯하게 여겼다. 태조
가 물러나와 최영
에게 말하기를 “내일 마땅히 다시 임금님께 네 가지 불가한 일을 아뢰십시오”하니 최영
이 “그리하시오” 하였다. 밤에 최영
이 다시 들어가 아뢰기를 “원컨대 다른 말을 받아들이지 마소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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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우왕
이 태조
를 불러 “이미 군사를 일으켰으니 중지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태조
가 아뢰기를 “반드시 큰 계책을 이루려 하신다면, 전하께서 서경(西京)
에 머물면서 가을까지 기다렸다가 군사를 내어 들판을 뒤덮은 곡식으로 대군을 배부르게 먹인다면, 북을 울리며 전진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출병할 때가 아니니, 비록 요동의 한 성을 함락시킨다 하더라도 한창 비가 와서 군사가 움직일 수 없어 군사는 태만해지고 양식은 떨어져 단지 화만 초래할 뿐입니다” 하였다. 우왕
이 “경은 이자송을 보지 못하였는가”라고 하였다. 태조
가 “자송은 비록 죽었으나 아름다운 이름이 후세에 전하지만 신 등은 비록 살아 있으나 이미 실책을 하게 되었으니 무슨 소용입니까” 하였으나, 우왕
은 듣지 않았다. 태조
가 물러나와 눈물을 흘리면서 우니 부하 장사들이 “왜 그렇게 슬퍼하십니까?”라고 하였다. 태조
가 말하기를 “백성들의 화(禍)가 이제부터 시작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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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일에 우왕
이 평양에 머물면서 여러 도의 군사의 징발을 독촉하여 압록강에 부교(浮橋)를 만들고 대호군 배구(裵矩)가 감독하도록 하였다. 임견미⋅염흥방 등의 재산을 배로 서경
에 운반하여 군사의 상(賞)에 충당하기로 하며, 또 도성 안팎의 중들을 징발하여 군사로 만들었다. 병진일에 최영
을 팔도도통사로 임명하고,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 조민수(曹敏修)를 좌군도통사로 삼아 서경
도원수 심덕부와 부원수 이무(李茂), 양광도 도원수 왕안덕, 부원수 이승원(李承源), 경상도 상원수 박위(朴葳), 전라도 부원수 최운해(崔雲海), 계림(雞林) 원수 경의(慶儀), 안동(安東) 원수 최단(崔鄲), 조전원수 최공철(崔公哲), 팔도도통사 조전원수 조희고(趙希古)⋅안경(安慶)⋅왕빈(王賓)을 예속시켰다. 태조
를 우군도통사로 삼아 안주도 도원수 정지(鄭地)와 상원수 지용기(池湧寄), 부원수 황보림(皇甫琳), 동북면 부원수 이빈(李彬), 강원도 부원수 구성노(具成老), 조전원수 윤호(尹虎)⋅배극렴(裵克廉)⋅박영충(朴永忠)⋅이화(李和)⋅이두란(李豆蘭)⋅김상(金賞)⋅윤사덕(尹師德)⋅경보(慶補)와 팔도도통사 조전원수 이원계(李元桂)⋅이을진(李乙珍)⋅김천장(金天莊)을 예속시켰다. 좌우군이 모두 3만 8830명이고, 심부름꾼이 1만 1600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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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절요』권33, 신우 4 무진 14년 4월
을미일에 우왕
이 성주(成州) 온천에 갔다. 좌우군 도통사가 최영
에게 사람을 보내어 빨리 군사를 돌이키게 허락하기를 청하였으나, 최영
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군중에서 헛소문이 돌기를, “이성계
가 휘하 군사를 거느리고 동북면으로 향하려고 이미 말에 올랐다” 하였다. 군중이 흉흉하였는데, 조민수는 어찌 할 줄을 모르고 홀로 말을 타고 태조
에게 달려가서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공이 떠나면 우리들은 어디로 가란 말입니까” 하였다. 태조
가 “내가 어디로 간단 말인가. 공은 이러지 마시라” 하였다. 그리고는 여러 장수에게 말하기를, “만일 상국의 국경을 넘어 천자께 죄를 얻으면 종사와 백성에게 화가 곧 이를 것이다. 내가 순(順)과 역(逆)으로써 글을 올려 회군하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살피지 못하고, 최영
이 또 늙고 어두워 듣지 않으니, 어찌 그대들과 함께 왕을 뵙고 화와 복을 진언하고 왕 옆의 악한 사람(최영
)을 제거하여 백성들을 편안히 하지 않으랴” 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모두 말하기를 “우리 동방 사직의 안위가 공의 한 몸에 달려있으니 감히 명령대로 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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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군사를 돌이켜 압록강을 건너는데, 태조
가 백마를 타고 붉은 활과 흰 색 새털을 깃으로 단 화살을 메고 강 건너에 서서 군사가 다 건너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군중에서 바라보고 서로 말하기를, “예로부터 이와 같은 사람이 있지 않았고, 지금 이후로도 어찌 다시 이런 사람이 있을까” 하였다. 이때 장마가 며칠이 되어도 물이 넘치지 않았는데 군사가 건너고 나자, 큰물이 갑자기 닥쳐 온 섬이 잠기므로 사람들이 모두 신기하게 여겼다. 이때 동요(童謠)에 ‘목자득국(木子得國)’이란 말이 있어 군사와 백성이 나이 상관 없이 모두 노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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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절요』권33, 신우 4 무진 14년 5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