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점(文益漸, 1329~1398)
은 진주 강성현(江城縣)
때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언(正言)
'문익점(文益漸, 1329~1398)' 관련자료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람이다. 공민왕
'공민왕' 관련자료
중서문하성의 종6품 관직인 낭관으로 간쟁과 봉박을 맡음
이 되었다.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머물며 덕흥군(德興君)
충선왕의 서자 왕혜(王譓
편에 붙었다가 그가 패배한 후 귀국하였다. (그는) 돌아오는 길에 목화씨를 얻어와 장인인 정천익(鄭天益, ?~?)에게 부탁하여 심도록 하였다. 처음에는 재배하는 방법을 몰라 거의 말라 죽이고 한 줄기만 살았는데, 3년 만에 크게 번식하였다. 목화씨를 뽑는 씨아와 실을 뽑는 물레는 모두 정천익이 만들었다.『고려사』권111, 「열전」24 [제신] 문익점
……(중략)…… (문익점
은) 계품사(計稟使)인 좌시중(左侍中) 이공수(李公遂, 1308~1366)의 서장관(書狀官)
'문익점' 관련자료
외국에 사신을 보낼 때 문서 기록을 맡은 관원
이 되어 원(元)나라 조정에 갔다가, 장차 돌아오려고 할 때 길가의 목면 나무를 보고 그 씨 10여 개를 따서 주머니에 넣어 가져 왔다. 갑진년(1364, 공민왕
13)에 진주에 도착하여 그 씨의 반을 전객령(典客令)을 지낸 고향 사람 정천익(鄭天益)에게 주어 이를 심어 기르게 하였는데 단 한 개만이 살아남았다. 정천익이 가을이 되어 씨를 따니 100여 개나 되었다. 해마다 더 심어서 정미년(1367) 봄에는 그 종자를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심어 기르도록 권장하였다. 문익점
자신이 심은 것은 모두 꽃이 피지 않았다.
'공민왕' 관련자료
'문익점' 관련자료
중국 승려 홍원(弘願)이 정천익의 집에 이르러 목면을 보고는 너무 기뻐 울면서 말하기를, “오늘 다시 본토의 물건을 볼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하였다. 정천익이 (홍원을) 머물게 하여 며칠 동안 대접한 후 실을 뽑고 베 짜는 기술을 물으니, 홍원이 그 상세한 것을 자세히 말하여 주고 또 기구까지 만들어 주었다. 정천익이 자기 집 여종에게 가르쳐서 베를 짜 1필을 만들었다. 이웃 마을에 전하여 서로 배워 알아서 한 고을에 보급되고, 10년이 되지 않아서 또 한 나라로 널리 퍼졌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나라에서는 홍무(洪武) 을묘년(1375) 문익점
을 불러 전의주부(典儀注簿)로 삼았다. 벼슬이 여러 번 승진되어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에 이르렀다가 70세에 죽었다.
'문익점' 관련자료
『태조실록』권14, 7년 6월 13일(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