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고려 시대경제경제생활

외국과의 무역 활동

○ 갑인(甲寅)에 흑수 말갈(黑水靺鞨)의 아리고(阿里古)가 왔다. 이 달에 대식국(大食國)의 열라자(悅羅慈) 등 100명이 와서 특산물을 바쳤다.【대식국은 서역(西域)에 있다】

『고려사』권5, 「세가」5 현종 15년 9월

○ 11월 병인(丙寅)에 대식국(大食國) 상인 보나합(保那盍) 등이 와서 수은(水銀)⋅용치(龍齒)점성향(占城香)몰약(沒藥)대소목(大蘇木) 등의 물품을 바쳤다. 담당자에게 명하여 객관(客館)에서 후하게 대우하고 돌아갈 때에 금과 비단을 후하게 내려 주도록 하였다.

『고려사』권6, 「세가」6 정종 6년 11월 병인

○ (덕종 3년) 11월에 팔관회(八關會)를 열었다.신봉루(神鳳樓)에 들러 모든 관료에게 큰 잔치를 베풀었다. 그리고 다음 날 대회(大會)를 열면서 또 큰 연회를 베풀며 음악을 관람하였다.동경(東京)서경(西京)의 2경(京)과 동북 양로 병마사(東北兩路兵馬使), 4도호(都護), 8목(牧)이 각각 글을 올려 축하하였다. 송(宋)의 상인과 동서번(東西蕃), 그리고 탐라국(耽羅國)도 또한 특산물을 바쳤으므로 자리를 내주어 음악을 관람하게 하였는데, 이후에는 상례(常例)로 하였다.

『고려사』권69 「지」23 [예11] 중동팔관회의 덕종 3년 11월

○ 九月甲寅, 黑水靺鞨阿里古來. 是月, 大食國悅羅慈等一百人來, 獻方物【大食國在西域】.

『高麗史』卷5, 「世家」5 顯宗 15年 9月

○ 十一月丙寅, 大食國客商保那盍等來, 獻水銀⋅龍齒⋅占城香⋅沒藥⋅大蘇木等物. 命有司, 館待優厚, 及還, 厚賜金帛.

『高麗史』卷6, 「世家」6 靖宗 6年 11月 丙寅

○ 十一月, 設八關會. 御神鳳樓, 賜百官酺. 翌日, 大會, 又賜酺, 觀樂. 東⋅西二京⋅東⋅北兩路兵馬使⋅四都護⋅八牧, 各上表陳賀. 宋商客⋅東西蕃⋅耽羅國, 亦獻方物, 賜坐觀樂, 後以爲常.

『高麗史』卷69 「志」23 [禮11] 仲冬八關會儀 德宗 3年 11月

이 사료들은 고려가 대식국이나 송, 동서번, 탐라국 등과 교역을 하였음을 알려 준다. 따라서 고려의 교역 범위가 말갈족 가운데 하나인 흑수 말갈(黑水靺鞨)이나 대식국(大食國), 동서번, 즉 여진, 그리고 현재의 제주도인 탐라와 송나라 등 비교적 다양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 시대의 특산물 교역 대상은 송나라에만 국한되었던 것이 아니라 거란이나 여진, 송, 탐라 등을 넘어 서역에까지 미치고 있었던 것이다.

고려 태조(太祖, 877~943, 재위 918~943)의 가계는 송악군을 중심으로 해상 무역을 주도한 해상 세력가였다. 2대 왕인 혜종(惠宗)의 외가 또한 해상 세력이라 할 수 있는 나주의 호족 가문이었다. 더구나 고려는 건국 초부터 중국의 5대 및 송나라와 수교하여 지속적인 사신의 왕래가 있었다. 고려 건국을 주도한 세력의 성격과 고려 초의 국제 정세 및 교류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태조 대부터 고려는 외국에 대해 개방적 측면이 강하였다 하겠다.

고려의 대외 교역 활동을 볼 때 일차적으로 주목되는 나라는 송나라였다. 송나라가 건국한 후 고려와 송나라는 260여 년간 130여 회에 걸쳐 약 5,000명이 왕래하였다. 따라서 송나라 상인들의 교역로와 무역항은 일찍부터 개발되어 있었다. 해상 무역로로는 우선 산둥 반도[山東半島]의 등주[登州]를 출발하여 황해도 북부를 거쳐 장산곶을 통해 예성강 벽란도로 들어오는 북로가 있었으나, 거란과 여진 등이 방해하였기 때문에 이용이 줄어들었다. 북방 민족의 압박으로 남방에 대한 개발 압력이 커지면서 양쯔강 이남이 활발히 개발되었다. 이로 인해 소위 ‘남로’라 불리는 교역로가 개발되었는데, 이는 밍저우[明州]에서 출발하여 고려의 흑산도, 군산도, 태안 반도를 거쳐 벽란도로 들어오는 길이었다. 이들은 주로 서남 계절풍을 이용하여 고려에 왔는데, 7월에는 약 22회, 8월에는 약 38회에 이르렀다. 송나라 상인의 경우 취안저우[泉州]⋅광둥[廣東]⋅밍저우[明州]⋅푸저우[福州]⋅타이저우[台州] 등 남쪽 지역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그 가운데서도 취안저우와 밍저우 출신이 많았다.

이처럼 강남 일대의 개발은 이 지역을 중심으로 한 교역의 활성화를 가져 왔다. 아라비아 반도나 인도, 동남아시아의 상인들도 고려에 큰 관심을 가졌다. 특히 이들 상인들은 송나라가 중계 무역을 통해 구입한 고려 물품을 사 갔다. 당시 고려는 1018년(현종 9) 강감찬(姜邯贊, 948~1031) 등이 중심이 되어 동아시아의 최대 강국이라 할 수 있는 요(遼)나라의 공격을 물리치고 대승을 거둔 뒤였다. 이로 인해 고려의 위상은 높아졌고, 송나라뿐만 아니라 송나라와 교역을 하던 다른 지역에서도 관심을 가졌다.

사료 1에는 흑수 말갈인 아리고(阿里古)가 등장하며, 또 대식국 상인 100명이 와서 특산물을 바쳤다고 한다. 교역 범위가 멀리 대식국, 즉 아라비아에까지 미치고 있음이 보인다. 대식국 상인은 모두 세 차례 고려를 찾아와 특산물을 바쳤다. 사료 1에 보이는 1024년(현종 15)과 그 이듬해, 그리고 사료 2에 보이는 1040년(정종 6)이었다. 특히 사료 1에서 100명이 왔다고 한 것을 보면, 이때는 무역로 개척을 위한 성격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듬해에 그들이 다시 찾아온 것도 이와 관련이 있었다. 그들은 1040년에도 수은(水銀)⋅용치(龍齒)⋅점성향(占城香)⋅몰약(沒藥)⋅대소목(大蘇木) 등의 물품을 가져와 바쳤다.

당시 상인들의 교역은 사헌(賜獻)이 주된 방식이었다. 이에 따라 정종은 대식국 상인들을 객관에 머물게 하고 금과 비단을 후하게 내려 주었다. 하지만 대식국 상인들은 고려까지 오는 동안의 비용이나 위험성 등을 고려할 때 큰 이익을 본다고 판단하지 않았으므로, 이들의 교역은 세 차례에 그쳤다. 대신 그들은 고려로의 해상 교역로를 장악하고 있던 송나라 상인의 중계를 통한 무역에 더욱 관심을 가졌다.

한편 외국과의 교역에서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는 팔관회(八關會)를 꼽을 수 있다. 팔관회는 고려에서 가장 큰 축제였다. 전국의 특산물이 올라오고, 각종 음악과 춤이 이어졌으며, 고려 주변의 국가들까지 참여하였다. 팔관회는 매년 개경과 서경에서 한 차례씩 열렸는데, 개경의 팔관회는 중동(仲冬)인 11월 보름에 열렸기 때문에 중동팔관회로도 불렸다. 사료 3은 이러한 중동팔관회의 내용을 보여 준다. 송나라 상인과 동서번(東西蕃)의 여진족들, 그리고 탐라국 등에서도 상인과 사절단을 보내어 참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도 역시 상인과 사절단 등은 국왕에게 특산물을 받쳤고, 국왕은 그들을 후하게 대접하며 그 대가를 지급하였다.

당시 교역 물품으로는 송나라에서 들어온 비단류, 차와 약재, 서적, 악기와 음악, 후추와 같은 향료나 향목, 물소뿔이나 상아, 비취⋅마노⋅호박 등의 보석류 등 매우 다양했다. 고려는 이에 대해 삼베⋅모시나 인삼, 금과 은, 종이와 먹 등을 지급하였다. 이 외에도 잣이나 자수정, 칠, 돗자리, 나전 등도 있었다.

따라서 이들 사료들은 고려가 외국과 교역 활동을 활발하게 하였고, 그 범위가 대식국, 즉 아라비아에게까지 미쳤음을 보여 준다. 이런 까닭으로 서역에 ‘코리아’의 이름이 널리 알려질 수 있었던 것이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중세 중동문헌에 비친 한국상」,『한국사연구』16,金定慰,한국사연구회,1977.
「고려와 대식의 교역과 교류」,『문화사학』25,김철웅,한국문화사학회,2006.
「남양제국인의 내왕무역에 대하여」,『사학연구』18,이현종,한국사학회,1964.
저서
『동방사논총』, 김상기, 서울대학교 출판부, 1974.
편저
「고려와 아라비아와의 관계」, 나종우, 국사편찬위원회, 1995.

관련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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