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고려 시대경제농장의 확대와 상업

승려들의 상공업 활동

불보(佛寶)의 돈과 곡식은 여러 절의 중이 각기 주⋅군에서 사람을 보내 관장하는데, 해마다 장리(長利)를 주어 백성을 괴롭힙니다. 청하건대 이를 모두 금지하시고 그 돈과 곡식을 사원의 전장(田莊)으로 옮기소서. 만약 그 주인 가운데 전정(田丁)을 가진 경우는 모두 이를 취하여 사원의 장(莊)과 소(所)에 소속시킨다면 백성들의 피해가 조금 줄어들 것입니다. ……(중략)……

신이 듣건대 승려들이 군⋅현을 왕래하면서 관(館)과 역(驛)에 유숙하는데, 지방의 아전과 백성을 매질하면서 영접과 공궤(供潰)가 소홀하다고 꾸짖어도 아전과 백성들은 이들이 왕명을 받고 온 것인지 의심하여 두려워하고 감히 말하지 못하니, 이보다 큰 폐단이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중들이 관⋅역에 유숙하는 것을 금지시켜 그 폐단을 제거하소서.

『고려사절요』권2, 성종문의대왕 임오 원년 6월

병신일에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석가모니가 불교를 창시한 것은 청정(淸淨)으로 근본을 삼아 온갖 더러운 것을 멀리하고 탐욕스러운 생각을 없애자는 것이었다. 지금은 나라의 역사를 기피하는 무리들이 승려 명단에 이름을 올려 놓고는 재산을 모아 생계를 꾸리거나 농사와 축산업을 생업으로 삼고 장사를 일삼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밖에 나가서는 ‘계율(戒律)’의 조문을 위반하고 안에 들어와서는 ‘청정(淸淨)’의 약속이 없으며 몸에 입는 장삼은 술독 덮개로 굴러 떨어지고 불경을 강독하는 장소는 채소밭으로 변하였다. 장사치들과 결탁하여 물건을 사고팔고 잡인들과 어울려 술판을 벌이며, 기생집에서 난잡하게 뒤섞여놀면서 우란분(盂欄盆)을 더럽힌다. 속인의 관(冠)을 쓰고 속인의 옷을 입으며 사원을 짓는다는 명목으로 돈을 거두어 깃발과 북을 마련하여 저잣거리와 마을을 다니면서 사람들과 싸워 피투성이가 되기도 한다. 내가 그들의 선악을 구분하고 규율을 엄격히 하려 하노니, 서울과 지방의 사원들을 정리하여 계율에 충실한 자는 그대로 머물게 하고 계율을 위반한 자는 법에 따라 죄를 논하도록 하라.”

『고려사』권7, 「세가」7 문종 10년 9월 갑신

一, 佛寶錢穀, 諸寺僧人, 各於州郡, 差人勾當, 逐年長利, 勞擾百姓. 請皆禁之, 以其錢穀, 移置寺院田莊. 若其主典, 有田丁者, 幷取之, 以屬于寺院莊所, 則民弊稍減矣. ……(中略)……

一, 臣聞, 僧人往來郡縣, 止宿館驛, 鞭撻吏民, 責其迎候供億之緩, 吏民疑其銜命, 畏不敢言, 弊莫大焉. 自今禁僧徒, 止宿館驛, 以除其弊.

『高麗史節要』卷2, 成宗文懿大王 壬午 元年 6月

丙申, 制曰. 釋迦闡敎, 淸淨爲先, 遠離垢陋, 斷除貪欲. 今有避役之徒, 托號沙門, 殖貨營生. 耕畜爲業, 估販爲風. 進違戒律之文, 退無淸淨之約, 袒肩之袍, 任爲酒甖之覆, 講唄之場, 割爲葱蒜之疇. 通商買賣, 結客醉娛, 喧雜花院, 穢臭蘭盆. 冠俗之冠, 服俗之服, 憑托修營寺院, 以備旗鼓歌吹, 出入閭閻, 搪揬市井, 與人相鬪, 以致血傷. 朕庶使區分善惡, 肅擧紀綱, 宜令沙汰中外寺院, 其精修戒行者, 悉令安住, 犯者以法論.

『高麗史』卷7, 「世家」7 文宗 10年 9月 甲申

이 사료들은 고려 시대 불교가 성행함에 따라 사원과 승려들이 고려 초부터 이미 경제 활동을 적극 전개하고 있었으며, 그것이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어 국왕이 이를 금하는 조처까지 내려야 했음을 보여 준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사료는 982년(성종 1년) 6월 최승로(崔承老, 927~989)가 올린 ‘시무 28조’ 가운데 일부로 불보(佛寶)가 설치되었으나 이미 이자놀이를 하고 있어 문제가 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승려들이 군⋅현에 왕래하면서 역관에 머물고 대접을 성대하게 받으려 하며 매질과 질책을 멋대로 하고 있어 문제가 되므로 이를 금할 것을 청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세 번째 사료는 1056년(문종 10년) 9월에 내린 조서로 절에 승적을 걸어 놓고 재산을 축적하고 농⋅축산업뿐 아니라 장사까지 하는데, 술을 빚어 팔고 채소밭을 경영하면서 광대놀이에도 참여하는 등 승려로서 지켜야 할 본분을 잃고 있으므로 이를 금한다는 조치를 보여 주고 있다.

고려 시대 상업의 특징 중 하나는 사원이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였다는 점이다. 사원은 당연히 승려들이 수행하며 생활하는 공간이었지만, 여기에는 광대한 사령(寺領)이 딸려 있어 많은 미곡이 생산되어 모이고 또 우수한 수공업 제품이 제조되었다. 그러므로 사원은 수공업 제품이나 미곡 및 마늘⋅파 등의 농산물, 심지어 양주업 등을 통해 상업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파나 마늘은 승려가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 작물인데도 재배하고, 나아가 판매까지 하고 있어 자주 문제가 되었다.

고려에서는 승려의 사회적 지위가 매우 높았다. 이 때문에 승려의 사회적 활동이 활발하였는데, 왕사 또는 국사로서 국정에 참여하기도 하고, 국가 대사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국가에서도 사원과 병사전⋅노비 등을 지급함으로써 사원과 승려에게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 주었으며, 특히 비보사찰(裨補寺刹)에는 특별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귀족들도 사원에 토지와 노비를 기증하거나 직접 사원을 짓기도 하였다.

따라서 사원은 막대한 토지와 노비, 그리고 사원에 딸린 농민들을 활용하여 경제 기반을 확대시켰다. 조세로 거둔 곡물이나 고리대 외에 직접 수공업 제품을 생산하고 판매하여 수익을 얻기도 하였다.

사원은 수공업 제품 생산에도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였다. 우선 사원은 불상이나 불구(佛具)의 제작을 위해 목공과 금속 가공 기술자를 다수 거느리고 있었다.

또한 포⋅기와⋅소금 생산이 발달하였는데, 처음에는 자체 수요를 위해 생산하였으나 점차 생산량이 증가하여 민간에 판매하기까지 하였다. 사원에서는 노비를 활용하여 직물 생산을 담당하였으며, 여승들이 거처하는 사원에서도 직조법이 행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사원에는 기와를 굽는 승려도 있었다. 예컨대 충렬왕(忠烈王, 재위 1274~1308)이 승려 육여(陸麗)를 강화도로 보내 유리와(琉璃瓦)를 굽게 하였다. 육여는 광주의 의안토를 가져다 황단을 많이 사용해 유리와를 구웠는데, 품질과 색상이 아주 뛰어나 시전 상인들이 파는 것보다 우수하였다고 한다.

사원은 교역의 중요한 장소였다. 불교 행사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으며, 이때 자연스럽게 교역이 이루어졌다. 지방 사찰이 개경의 거래에 참여하는 경우도 있었다. 금강산 장안사가 개경에 점포를 가지고 있으면서 이곳을 통해 수취한 물품이나 교역에서 확보한 물품을 처분하거나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였다.

사원은 공물 납부와 관련해서도 상업 활동을 하였다. 대납(代納)이 그것이다. 이는 국가 권력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사원은 중국에서 경전이나 단청 원료를 구입하기 위해 국제 교역에 종사하였다.

교역에는 원거리 수송도 있어서 말이 필요하였다. 사원은 이러한 말들도 많이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공업의 중심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고려 시대의 사원은 이처럼 상당한 경제력을 가졌으며 큰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신진 사대부는 이러한 사원의 역할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 시대에는 사원의 경제력이 크게 축소되었고, 승려의 지위나 사회적 영향력도 크게 위축되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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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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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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