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돈중(金敦中, ?~1170)은 인종(仁宗)
때 괴과(魁科)
을 위로하고자 1등으로 올려 내시(內侍)에 속하게 하였다. 나이는 어렸지만 기백이 날카로웠던 그는 궁정에서 나례(儺禮)
의 수염을 태웠는데 정중부
는 이 때문에 원한을 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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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급제
에 뽑혔다. 지공거(知貢擧)
고려 시대 과거의 고시관
한유충(韓惟忠, ?~1146) 등은 그를 2등으로 삼으려 했는데 왕이 그의 아버지 김부식(金富軾, 1075~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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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섣달그믐에 잡귀를 쫓기 위해 벌인 의식
하는 날 저녁에 촛불로 정중부(鄭仲夫, 1106~1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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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돈중은 의종(毅宗)
때 거듭 승진하여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가 되었는데, 왕이 환관 정함(鄭諴)을 합문지후(閤門祗候)로 임명하자 고신장(告身狀)에 서명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으로 좌천되었다가 시랑(侍郞)으로 옮겼다. 처음에 이부시랑(吏部侍郞) 한정(韓靖)이 이원응(李元膺, ?~1160)과 서로 틈이 생겨 파직되었다. 왕이 따로 불우(佛宇)를 인제원(仁濟院)에 창건하여 복을 비는 곳으로 삼았는데, 그때 마침 이원응이 죽고 한정은 복직되어, 인제원에서 더욱 부지런히 복을 빌었다. 김돈중이 아우 김돈시(金敦時, ?~1170)와 더불어 김부식
이 창건한 관란사(觀瀾寺)를 중수하고 왕을 위해 복을 빈다는 소문이 자자하였다. 왕이 김돈중, 김돈시와 한정에게 말하기를, “듣건대 경들이 과인을 위해 축원한다 하니 매우 가상하도다. 짐이 장차 가서 보겠노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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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돈중 등은 또한 절 북쪽 초목이 거의 없는 산에다 인근 백성을 모아 소나무⋅측백나무⋅삼나무⋅회나무와 기이한 화초를 심고 단을 쌓아 어실(御室)을 삼았는데 금벽(金碧)으로 꾸미고 섬돌은 모두 기이하게 생긴 돌을 썼다. 어느 날 왕이 절에 행차하자 김돈중 등은 절의 서대(西臺)에서 잔치를 베풀었는데 장막과 그릇 등이 매우 사치스러웠으며 음식도 극히 진기한 것으로 차렸다. 왕은 재상 및 근신과 더불어 흡족하게 즐기고는 김돈중과 김돈시에게 백금(白金) 각 3정(錠), 한정에게는 2정, 나견(羅絹) 각각 10필(匹), 단사(丹絲) 각각 70근(斤)을 하사하였다.
(의종
) 21년(1167)에 김돈중이 좌승선(左承宣)이 되었는데 연등(煙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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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 상원 연등회
하는 저녁에 왕이 봉은사(奉恩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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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왕건의 어진을 모셔 놓은 국가 사찰
에 행차하였다가 밤에 돌아오는데 관풍루(觀風樓)에 이르게 되었다. 이때 김돈중의 말이 본래 잘 조련되지 않아서 징과 북 소리를 듣자 더욱 놀라 날뛰었다. 결국 말 탄 군사의 화살통에 부딪쳐 화살이 튀어나와 임금의 수레 곁에 떨어졌다. 김돈중이 사정을 말할 겨를도 없이 왕은 놀라서 시해하려 쏜 화살(流矢)로 의심하고 의장용 일산으로 자신이 탄 수레를 가리도록 하였다. 그러고는 급히 길을 재촉하여 궁으로 돌아온 후 궁성에 계엄하고 해당 부서에 명하여 시내 각 처에 관련자를 잡으면 상금을 주겠다는 방문을 붙이니 체포된 자가 매우 많았다. 왕은 대령후(大寧侯) 왕경(王暻)의 집 종 나언(羅彦) 등의 소행으로 의심하여 가혹하게 국문하였다. 나언이 고문을 못 이기고 거짓 자백하자 드디어 그를 베어 죽였다. 또 금위군(禁衛軍)이 사태를 막지 못하였다 하여 견룡(牽龍)
숙위와 의위를 맡은 금군의 한 부대
⋅순검(巡檢)
도성 내 치안 질서 유지를 맡은 군대
⋅지유(指諭)
고려 시대 무관 보직의 하나
등 14인을 귀양 보냈다. 당시 왕이 자주 연복정(延福亭)에 행차하여 한뢰(韓賴)⋅이복기(李復基, ?~1170)⋅허홍재(許洪材, ?~1170) 등과 더불어 잔치를 열면서 술자리를 가졌다. 하루는 장차 염현사(念賢寺)로 옮기려고 수레를 준비시켰는데, 배 안에서 술을 마시고 서로 매우 취하여 밤이 깊도록 돌아갈 줄 모르고 놀았다. 위사(衛士)들이 한뢰와 이복기를 매우 원망하는지라 김돈중이 왕께 나와 아뢰기를,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호종하느라 군사가 다 굶주려 피곤한데 왕은 어찌 그리 즐거우십니까. 밤이 또한 어두운데 구경할 것이 무엇이 있다고 여기서 이리 오래 머무르나이까” 하였다. 왕은 불쾌해하면서 나왔는데 이미 새벽이 되었다.
보현사의 변(普賢寺變)
는 묵은 원한을 풀고자 김돈중에 대해 상(賞)을 걸어 급히 잡고자 하였다. 김돈중은 몰래 부리던 노비를 시켜 도성에 들어가 집 안부를 살피도록 했는데, 노비가 많은 상금을 탐내 밀고하였다. 결국 그는 사로잡혀 사천(沙川)가에서 죽게 되었는데 탄식하기를, “내가 한뢰와 이복기에게 아첨하지는 않았으니 실로 죄는 없다. 다만 이전의 유시(流矢)의 변 사건으로 죄 없는 사람들에게 해를 입게 하였으니 오늘 이런 변을 당한 것도 마땅하다”고 하였다. 아들은 김군수(金君綏)이다.
의종 24년(1170) 8월에 일어난 정중부의 난 혹은 무신난
(당시에) 김돈중은 또 왕을 호종하였는데, 도중 참변이 일어났다는 것을 듣고는 취한 척하며 말에서 떨어져 감악산(紺嶽山)으로 도주하였다. 정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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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권98, 「열전」11 [제신] 김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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