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주(春州)
춘천
의 청평산(淸平山)은 옛날 경운산(慶雲山)이요, 문수원(文殊院)은 옛날의 보현원(普賢院)이다. ……(중략)……
문종(文宗)
23년(1069) 무신(戊申)1)
에 전 좌산기상시지 추밀원
사(左散騎常侍知樞密院事)인 이의(李顗, ?~?)가 춘주도 감창사(春州道監倉使)로 왔다가, 경운산의 좋은 경치를 사랑하여 백암선원의 옛터에다 절을 짓고 ‘보현원(普賢院)’이라 하였는데, 희녕(熙寧) 원년(1068, 문종
22) 때의 일이었다.
'문종(文宗)' 관련자료
'추밀원' 관련자료
'문종' 관련자료
그 뒤 희이자(希夷子)
37)에 진사과에 급제하여 원우(元祐) 4년(1089, 선종
6)에 대악서승(大樂署丞)의 관직에 있다가, 벼슬을 버리고 세상을 피하여 다녔다. 임진강을 건너면서 스스로 맹세하기를 “이제 가면 다시는 개경
에 들어가지 않으리라” 하였다.
이자현의 호
가 벼슬을 버리고, 여기에 숨어 지내면서부터 도둑도 없어지고 호랑이도 종적을 감추었으니, 이에 산 이름을 ‘청평산(淸平山)’이라 고쳤다. 또한 문수보살(文殊菩薩)을 두 번 보고는 불법의 중요한 가르침을 마땅히 물어 결정해야 된다고 하여, 원(院)의 이름을 ‘문수(文殊)’로 바꾸고는 다시 수리하였다. 희이자는 곧 이공(李公=이의)의 맏아들로 이름은 자현(資玄)이며 자(字)는 진정(眞精)이었다. 용모가 헌칠하고 욕심이 없었다. 원풍(元豐) 6년(1083, 문종
'문종' 관련자료
'선종' 관련자료
'개경' 관련자료
그가 공부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나, 깊이 불교의 이치를 연구하였고, 특히 참선을 좋아하였다. 스스로 말하기를 “일찍이 『설봉어록(雪峰語錄)』을 읽었는데 ‘천지가 하나의 눈[眼]인데 너는 어디에 웅크리고 앉아 있느냐’는 말이 있었다. 이 말에 바로 번쩍 깨달은 바가 있어 이후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 다시는 의심하거나 막히는 것이 없었다” 하였다. 그 후 나라 안의 이름난 산을 두루 돌아다니며 옛 성현의 유적을 탐방하였다. 뒤에 혜조국사
(慧照國師)가 근처 화악사(華岳寺) 주지로 있었기 때문에 왕래하면서 선(禪)의 교리를 문의하였다.
'국사' 관련자료
산에 있으면서 다만 채소 음식과 누비옷으로 검소하고 절제하며 청정한 것을 낙으로 삼았다. 문수원 밖에 있는 다른 마을에 조용하고 한가롭게 지낼 수 있는 암자⋅불당⋅정자 등을 지었는데 모두 10여 곳이나 되었다. 불당은 문성(聞性)이라 하였고 암자는 견성(見性), 선동식암(仙洞息庵) 등으로 각각 그 이름이 있었다. ……(중략)……
왕과 거듭 혼인한 세력 좋은 집안 사람으로서 산림에서 일생을 마친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는 아직 들어보지 못하였다. 공은 부귀의 세력을 가졌고, 또한 문장으로 과거에 급제하고 좋은 벼슬에까지 올랐으니, 조정에 들어가서는 대신을 지내며 나가서는 장수가 되는 것은 땅에서 지푸라기를 줍는 것과 같은 일일 뿐이다. 그런데도 부귀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신세를 뜬구름과 같이 생각하여 영원히 산중에 들어가서 다시는 개경
으로 돌아오지 않았으니 또한 기이하지 않은가. 더구나 공의 집안은 여러 대에 걸쳐 임금의 외척으로 삼한(三韓)의 으뜸가는 가문인데, 공만이 홀로 속세를 떠나 자유롭게 노닐어 세상의 번잡하고 괴로운 일이 미치지 않았고 덕과 명예가 더욱 높아졌으니, 어찌 식자들이 애석해하고 탄식할 일일 뿐이겠는가.
'개경' 관련자료
『동문선』권64 「기」 청평산문수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