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 4년(1217)에 최충헌(崔忠獻, 1149~1219)
부자는 자기 집에서 병장기를 가득 벌여 놓고 경계를 삼엄하게 하였다. 거란군이 도성 가까이 접근하자 모든 관리들에게 명해 성을 지키게 하는 한편, 성 밑의 민가들을 허물고 참호를 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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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흥왕사(興王寺)⋅홍원사(弘圓寺)⋅경복사(景福寺)⋅왕륜사(王輪寺)⋅안양사(安養寺)⋅수리사(修理寺) 등에서 종군한 승려들이 최충헌
을 살해할 것을 모의하고, 패잔병으로 가장해 새벽녘에 선의문(宣義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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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경
에 있던 나성의 정서쪽 성문으로 왕이나 사신 행차에 이용됨
에 이르러 “거란병이 벌써 쳐들어왔다.”고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러나 문지기 군사들이 막고 들여보내지 않자, 승려들은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면서 빗장을 부수고 들어가 군사 5~6명을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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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장(郞將) 김덕명(金德明, ?~?)은 음양설(陰陽說)로 최충헌
에게 빌붙어 벼슬이 지태사국사(知太史局事)
들은 내심 그것이 옳지 않음을 알고 있었으나 최충헌
이 두려워 감히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또 그는 자주 공사(工事)를 일으켜 사찰들을 침탈해 승려들이 모두 원한을 품고 있었는데, 승려들은 먼저 그의 집을 파괴한 후 최충헌
의 집으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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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역법 등을 담당하던 태사국에 소속된 종5품
에 이른 자였다. 그가 바친 새 책력은 모두 옛 역법을 고친 것이어서 일관(日官)
천문과 점성을 담당한 관리
과 대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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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거리에 이르렀을 때 순검군(巡檢軍)
이 가병(家兵)을 보내어 함께 공격하도록 하였다. 승려들의 우두머리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죽자 나머지 무리들은 도망쳐 선의문까지 갔으나 현문(懸門)이 내려져 있어 나가지 못하였다. 마침내 모두 흩어져 달아났지만 최충헌
의 군사들이 추격해 300여 명의 승려들을 죽였다. 그 일당을 생포해서 국문하자 중군원수(中軍元帥) 정숙첨(鄭叔瞻, ?~?)이 연루되었다는 진술이 나왔다.
순찰과 치안 유지를 담당한 군대
에게 쫓겨 도망친 승려들은 신창관(新倉館)에 이르러 순검군과 전투를 벌였는데, 최충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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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최충헌
은 성문을 닫고 도망간 승려를 대대적으로 수색하여 모두 죽였다. 때마침 큰비가 내리자 시체에서 흘러나온 피가 내[川]를 이루었다. 또 남계천(南溪川)에서 승려 300여 명을 죽였다. 전후로 거의 800여 명의 승려들이 참수당했으니, 산처럼 쌓인 시체 때문에 몇 달 동안 사람들이 지나가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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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권129, 「열전」42 [반역3] 최충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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