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선)왕이 또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문물이 중국과 같다고 하였는데, 지금 공부하는 자들이 모두 승려들을 따라다니며 경구(章句)나 익히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라고 물었다. 이제현(李齊賢, 1287~1367)
이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옛날에 태조
께서 처음 나라를 세우실 때 조금의 쉴 틈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먼저 학교를 세워 인재를 양성하였습니다. 한번은 서도(西都)
이후에는 더욱 교육을 정비하여 중앙에 국학(國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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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西京)
에 가자마자 수재 정악(廷鶚, ?~?)을 박사(博士)로 삼아 6부의 학생들을 가르치도록 하셨으며, 비단을 하사하여 학업을 권장하고 녹봉을 나누어 주어 인재를 길러내셨으니 교육에 대한 마음 씀씀이가 그토록 간절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광종(光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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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종(光宗)' 관련자료
국자감
을, 지방에 향교(鄕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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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의 국립 중등 교육 기관
를 세우고 동리마다 상서(庠序)
지방에 설치한 학교
를 보급하여 글 읽는 소리가 가는 곳마다 들리니 문물이 중국과 비등하다고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의종(毅宗)
말년에 무인의 변란
이 일어나 선악을 가림 없이 모조리 참살을 당했으며, 다행히 그 위험에서 빠져 나간 자들은 깊은 산골로 도망쳐 관복을 벗고 가리(伽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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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려들이 입는 옷
를 입은 채 생명을 부지하였으니 신준(神駿, ?~?), 오생(悟生, ?~?)과 같은 사람들이 다 그런 사람입니다. 그 후 나라에서 차츰 문치(文治)를 회복하였으나 비록 학문에 뜻을 둔 선비가 있어도 배울 곳이 없었으므로 모두 이 무리들을 따르며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공부하려는 자들이 승려들을 좇아 학문을 배우게 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이제 전하께서 학교를 널리 확충하고 지방의 교육 기관을 돌보며 육예(六藝)
고대 교육의 여섯 과목인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
를 존중하고 오륜(五倫)을 밝히어 선조들의 모범을 따른다면, 누가 참된 유가를 버리고 승려를 따르겠습니까?”라고 하였다.『고려사』권110, 「열전」23 [제신] 이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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