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고려 시대사회백성들의 생활 모습

고려도경에 나타난 민생

신이 듣기에 고려는 땅이 넓지 않으나 백성은 매우 많다.사민(四民)의 업(業) 중에 유학자를 귀하게 여기므로, 고려에서는 글을 알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산림이 매우 많고 넓고 평탄한 땅이 적기 때문에, 경작하는 농민이 장인에 미치지 못한다. 주군(州郡)의 토산물이 모두 관아에 들어가므로 상인은 멀리 다니지 않는다. 다만 대낮에 도성의 시장에 가서 각각 자기가 가진 것과 자신에게 없는 물건으로 바꾸는 정도에 만족하는 듯하다.

그러나 고려 사람들은 은혜를 베푸는 일이 적고 여색을 좋아하며, 분별없이 사랑하고 재물을 중히 여긴다. 남녀 간의 혼인에도 경솔히 합치고 쉽게 헤어져 전례(典禮)를 따르지 않으니 진실로 비웃을 만하다. 지금 그 나라의 백성을 그림으로 그리되 진사(進士)를 이 편(篇)의 첫머리에 둔다.

선화봉사고려도경』권19, 민서

臣聞高麗, 地封未廣, 生齒已衆. 四民之業, 以儒爲貴, 故其國, 以不知書, 爲恥.

山林至多, 地鮮平曠, 故耕作之農, 不迨工技. 州郡土產, 悉歸公上, 商賈不遠行. 唯日中, 則赴都市, 各以其所有, 易其所無, 煕煕如也.

然其爲人, 寡恩好色,泛愛重財. 男女婚娶, 輕合易離, 不法典禮, 良可哂也. 今繪其國民庶, 而以進士, 冠于篇.

『宣和奉使高麗圖經』卷19, 民庶 序

이 사료는 북송 사신으로 고려에 온 서긍(徐兢, ?~?)이 12세기 전반의 고려 사회 모습을 담은 자료이다. 서긍은 1123년(인종 1년) 6월 12일 개경에 들어와 7월 13일 귀국할 때까지 43일 동안 체류하면서 그 경과와 견문을 그림과 함께 엮은 사행 보고서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을 저술하였다. 1123년은 대외적으로는 북송이 금나라에 의해 멸망하기 4년 전으로 금의 압박이 강해지던 때이고, 대내적으로는 인종 즉위 다음 해로 문벌 귀족 사회가 절정기에 달해 그 모순이 표출되기 시작한 때였다. 서긍은 40여 권의 책에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고려의 산천과 풍속, 각종 제도, 왕래 도로 등을 상세히 기록했다. 그 중 고려의 민생을 다룬 이 사료에는 당시 고려의 풍속과 사⋅농⋅공⋅상의 경제 활동이 구체적으로 잘 드러나 있다.

첫째, 당시 고려 사회에서 유학을 교육하고 공부하는 것이 보편화되었음을 보여 준다. 서긍은 고려에서는 사⋅농⋅공⋅상의 업(業) 중 유학자를 귀하게 여겨 공부하지 않는 것을 수치로 여긴다고 하며, 특히 고려의 민간에서 유학을 배우는 현상이 일반적인 것을 상당히 높게 평가하였다. 그는 개경 거리에 경관(經館), 서사(書社)가 두세 집을 건너 바라보고 있을 정도로 교육과 관련된 시설이 즐비하였고, 결혼하지 않은 자는 모여 살며 선생에게 경서를 배우고, 좀 자란 아이들은 사관(寺觀)에서 배우며, 또 어떤 이들은 향선생(鄕先生)에게서 배운다고 하면서 사회에서 유학을 교육하고 공부하는 것이 보편화되었음에 대단히 감탄하였다.

둘째, 농민과 공장(工匠)의 경제적 지위가 잘 드러나 있다. 서긍은 고려에 산지가 많아 농민이 수공업자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는 농민들이 경제적 부는 수공업자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으로, 이들이 사회적으로 받는 대우와 달라 주목된다. 고려 시대의 신분제를 서긍과 같이 사⋅농⋅공⋅상의 틀에서 보았을 때 농민⋅수공업자⋅상인은 모두 양인 신분이었다. 그러나 농업을 본업(本業)으로 여기고 상업을 말업(末業)으로 여기는 전통적 관념으로 인해,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던 백정 농민에 비해 수공업자와 상인은 천사(賤事)⋅천역(賤役) 양인으로 천시되어 벼슬에 나갈 수 없도록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백정 농민은 국가로부터 직역(職役)을 지지 않았기 때문에 국가에서 토지를 지급받지도 못했고, 따라서 조상 대대로 물려오는 소규모 민전을 경작하거나 남의 토지를 빌려 소작할 수밖에 없어 경제적으로 열악하였다. 더욱이 국가에서는 백정 농민을 수취의 대상으로 삼아 조세⋅공부⋅역역을 부과했기 때문에, 과중한 세금 부담을 이기지 못해 토지를 잃고 유랑하는 농민들이 증가하였다. 그에 비해 군기시(軍器寺)나 선공시(繕工寺) 등 관청의 수공업장에 전속된 기술자인 관속 공장은 녹봉에 해당하는 별사(別賜)를 받았고, 그 중 기술이 뛰어난 경우에는 관계(官階)와 그에 해당하는 토지를 받기도 하였다. 또한 대다수 비관속 공장은 역의 형태로 일정 기간 국가에 동원되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그 이 외에는 자유로이 물품을 제조⋅판매하거나 보수를 받는 등, 서긍이 관찰한 바와 같이 농민에 비해 경제적으로 유복한 경우가 많았다.

셋째, 고려 시대에 국내 상업이 이루어지는 형태가 나타나 있다. 서긍은 개경의 시전(市廛)이 도시민의 생활품보다는 관청에서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는 기능을 했기 때문에 원거리 상업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주로 대낮에 시장이 열리고 물물교환이 이루어졌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와 같이 도시 상업은 개경⋅평양⋅경주⋅한양 등 주로 물자가 몰려드는 행정 중심지에 상설 점포인 시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관청에서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는 어용 상점의 성격을 띠었다.

한편 농촌에서도 불규칙적이지만 장시가 열렸는데, 아침에 나와 한낮에 장을 보고 돌아갈 수 있을 정도로 교통의 요지에 장이 섰다. 장시에는 여러 계층의 남녀노소가 장을 보러 나갔으며, 이전에 화폐가 주조되었음에도 금속화폐는 거의 유통되지 않고 물물교환이 백성들에게 가장 편리한 방식으로 인정되어 널리 행해진 것으로 보인다. 한편 고려 시대 상인은 양인이었지만 수공업자와 마찬가지로 천시되었고 벼슬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없었다.

이와 관련해 고려 말의 방사량(房士良)이라는 사람은 “선비⋅농민⋅상인⋅수공업자 가운데 농민이 제일 고달프고, 수공업자는 그 다음이며, 상인은 아무 일 없이 놀면서 무리를 지어 다니며 누에를 치지 않고도 비단옷을 입는다. 지극히 천하지만 좋은 음식을 먹는다”고 비난하였다. 이는 상인을 천시하는 전통적 시각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경제적 지위는 상당히 높았음을 보여 주고 있다.

넷째, 이혼과 재혼 등 당시 혼인 풍습의 일면을 보여 준다. 그는 고려인들이 쉽게 혼인하고 쉽게 헤어져 그 예법을 알지 못하니 가소롭다고 했는데, 이는 중화사상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지만 고려 시대에 이혼뿐 아니라 재혼이 비교적 자유롭게 이루어졌음을 보여 준다. 이렇듯 이혼과 재혼이 비교적 자유롭게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고려 시대에 여성의 지위가 높았다는 데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당시 여성들은 재산 상속, 호주 계승, 제사 등 가족 관계에서 남성과 거의 동등한 권리를 행사하였다. 즉 고려 시대에는 자녀의 성별에 관계없이 재산을 균분 상속했기 때문에 여성도 주된 상속 대상이었고, 상속받은 재산의 소유권과 처분권은 결혼 후에도 자신이 가졌다. 따라서 이혼과 재혼을 할 경우에도 자신의 재산을 그대로 가지고 갈 수 있었기 때문에 재혼한 여성도 당당히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또한 의붓아들에게도 음서의 혜택을 주는 등 고려 시대에는 재혼녀뿐 아니라 그들의 자식도 사회적 차별을 당하거나 관직 진출에 별다른 제약을 받지 않았던 점도 여성이 비교적 자유롭게 이혼과 재혼을 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그럼에도 이혼을 요구하는 쪽은 남성 측이 많았다. 고려 시대에는 출세를 위해서 처가의 가계도 중요했기 때문에, 남성들이 부와 명예를 얻기 위해 부인과 이혼하고 부유하거나 권세 있는 집안의 여자와 다시 결혼하거나 이를 권유받는 일이 꽤 있었다. 또한 남성은 부인이 죽었을 경우 재혼하는 것이 당연했지만 여성은 수절이 아름다운 덕목으로 추앙받았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지위가 높았던 고려의 여성도 여전히 시대적 한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서긍은 당시 송의 사대부들과 마찬가지로 중국을 선진 문화, 이민족을 후진 문화로 규정하고 주변 민족을 중국 문화에 동화된 민족과 그렇지 않은 오랑캐로 철저히 구분하고자 하였다. 그러면서 선진적 중국 문화가 고려에 유입되어 고려를 어떻게 중국화했는가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하지 않은 고려 고유의 문화적 특수성을 함께 관찰해 기록하고 있다. 이런 시각에서 봤을 때 고려에서 유교를 숭상하는 것은 중국 문화의 영향을 잘 받아들인 것으로 보아 긍정적으로 서술했고, 남녀 관계에서의 개방성은 중국 문화에 교화되지 못한 오랑캐의 습속으로 여겨 부정적으로 서술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고려도경』은 외국인의 눈에 비친 당대 고려 사회에 대한 자세한 기록으로, 우리 측 사료의 공백을 메워 주고 보완해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이 사료는 고려 시대 수공업자의 지위, 상업의 형태, 혼인 풍속 등 상대적으로 자료가 부족한 부분을 담고 있어, 고려 시대의 사회 모습과 민생을 이해하는 데 매우 의미 있는 자료로 널리 활용되고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고려시대의 상속제도」,『국사관논총』97,문정자,국사편찬위원회,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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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대 문헌 중의 고려사회」,『이화사학연구』28,장건,이화여자대학교 이화사학연구소,2001.
「고려시대 백성의 개념과 그 존재형태-고려 평민신분 이해를 위한 시론-」,『국사관논총』20,하태규,국사편찬위원회,1990.
「고려 여성의 지위와 역할」,『한국사시민강좌』15,허흥식,일조각,1994.
저서
『고려시대 천사⋅천역 양인 연구』, 김난옥, 신서원, 2000.
『고려사회사 연구』, 홍승기, 일조각, 2001.

관련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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