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고려 시대사회백성들의 생활 모습

몽골의 침입으로 황폐해진 백성의 삶

○ 3월에 여러 도의 고을들이 난리를 겪어 피폐해졌다.삼세(三稅) 이외의 잡세를 면제하고, 산성과 섬에 들어갔던 여러 도의 사람들을 모두 육지로 나오게 하였다. 그때에 공산성(公山城)에 들어갔던 백성 가운데 굶주려 죽은 자가 매우 많았는데, 늙은이와 어린이로 골짜기를 메울 정도였다. 심지어는 아이를 나무에 붙잡아 매어 놓고 가는 자도 있었다.

『고려사절요』권17, 고종안효대왕 42년 3월

김천(金遷)은 명주(溟州) 고을의 아전이었는데, 어렸을 때 자(字)는 해장(海莊)이었다. 고종(高宗) 말에 몽골 병사가 습격해 어머니와 아우 김덕린(金德麟)을 잡아 갔다. 이때 김천의 나이 15세였는데, 밤낮으로 큰소리로 울다가 사로잡힌 사람 가운데 많은 이가 길에서 죽었다는 말을 듣고 상복을 입고 상을 마쳤다. 14년 후에 백호(百戶) 습성(習成)이 원(元)으로부터 와서 명주 사람을 저자에서 3일이나 부르니, 마침 정선(旌善) 사람 김순(金純)이 이에 응하였다. 습성이 말하기를, “김씨란 여인이 동경(東京)에서 말하기를, ‘나는 본래 명주 사람인데 해장이란 아들이 있다.’라고 하고 나에게 편지를 부탁했는데, 네가 해장을 아는가?”라고 물었다. (김순이) “나의 벗이다.”라고 하고 편지를 받아 김천에게 주었다. 편지에 이르기를, “나는 살아서 모주(某州) 모리(某里) 모가(某家)에 이르러 종이 되었는데, 굶주려도 먹지 못하고 추워도 입지 못한다. 낮에는 밭을 매고 밤에는 방아를 찧어 갖은 고달픔을 겪고 있으니 누가 나의 생사를 알리요?”라고 하였다. 김천이 편지를 보고 통곡하고, 언제나 식사를 할 때면 목이 메어 넘기지를 못했다.

『고려사』권121, 「열전」34 [효우] 김천

○三月, 以諸道郡縣, 經亂凋弊. 蠲三稅外雜稅, 諸道郡縣入保山城海島者, 悉令出陸. 時公山城入保民, 飢死者甚衆, 老弱塡壑. 至有繫兒於樹而去者.

『高麗史節要』卷17, 高宗安孝大王 42年 3月

○ 金遷, 溟州吏, 小字海莊. 高宗末, 蒙古兵來侵, 母與弟德麟被虜. 時遷年十五, 晝夜號泣, 聞被虜者多道死, 服衰終制. 後十四年, 有百戶 習成自元來, 呼溟州人於市三日, 適旌善人金純應之. 成曰, 有女金氏在東京云, 我本溟州人, 有子海莊. 托我以寄書. 汝識海莊否. 曰, 吾友也, 受書持以與遷. 書云, 予生到某州某里某家爲婢, 飢不食寒不衣. 晝鋤夜舂, 備經辛苦, 誰知我死生. 遷見書痛哭, 每臨食, 嗚咽不下.

『高麗史』卷121, 「列傳」34 [孝友] 金遷

이 사료들은 고려와 몽골의 전쟁이 극심했던 시기에 일반 백성들이 겪었던 고초와 그로 인한 피해를 알려 주는 자료이다. 몽골은 고려에 사신으로 갔던 저고여(著古與, ?~1225)가 1225년(고종 12) 몽골로 돌아오던 길에 살해되자 이를 고려의 소행으로 단정하였다. 그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국교를 단절하는 한편 고려와 전쟁을 시작하려 했다. 그러나 실제 목적은 남송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방책 가운데 하나로, 전쟁을 치르기 전 고려를 단속하려는 의도가 강했다. 1231년(고종 18) 몽골은 마침내 살리타[撒禮塔, ~1232]를 앞장세워 고려를 침략하면서, 고려와 몽골의 약 30년 간에 걸친 긴 전쟁의 막이 올랐다.

사료 1은 최씨 무인 정권이 몽골과의 전쟁을 치르기 위해 강화도로 천도하였던 시기에 남겨진 백성들이 어떠한 삶을 살았는가를 잘 보여 준다. 사료에 보이듯이 최씨 무인 정권은 몽골군이 해전에 약하다는 점을 간파하고 백성들에게 섬이나 산성으로 들어가 저항하도록 권하였다. 전쟁이 장기화되고 전 국토가 전쟁터가 되면서 섬과 산성에 들어간 백성들은 생계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더구나 최씨 무인 정권은 백성들로부터 강제로 조세까지 징수하였다. 이로 인해 백성들은 전쟁으로 생명의 위협을 받는 와중에 조세 수취의 압박까지 더해져 생계가 더욱 어려워졌다.

그 결과 사료 1에서 보듯이 산성에 들어갔던 고려 백성 가운데 많은 이가 굶어 죽었다. 살아남기 위해 아이를 버리는 사람도 있었다. 『고려사』 권24 고종 41년(1254) 12월 갑오일의 기록에 따르면, 이 해에 몽골군에게 포로로 잡힌 백성은 무려 20만 6,800여 명에 이르렀으며, 사망자의 수는 헤아릴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한다.

몽골군은 고려의 전 국토를 짓밟았다. 경주까지 쳐들어가 황룡사를 불태웠으며, 사료 2에 보이듯 강원도 강릉 지역에도 이르렀다. 포로가 된 사람의 출신만 보더라도 진주(晉州), 원주(原州) 등 거의 모든 지역에 걸쳐 있었다. 이 때문에 포로로 잡혀간 이들에 대한 송환 문제는 고려 왕실이 처리해야 할 시급한 과제가 되었다. 고려 조정에서는 황제를 만날 때나 사절을 보낼 때 지속적으로 송환 요청을 하였다. 이로 인하여 포로로 잡혀가서 죽은 줄만 알았던 부모형제와 극적으로 만나는 백성들이 생겨났다. 사료 2는 이 같은 상황을 생생하게 전해 주고 있다. 이 사료의 주인공은 명주의 아전 김천과 그의 어머니였다. 김천이 15세였을 때 몽골군이 쳐들어와서 어머니와 동생을 잡아갔는데, 김천은 많은 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모친의 죽음을 지레짐작하여 상을 치렀다. 그러나 죽은 줄 알았던 어머니의 소식이 14년이 흐른 뒤에 전해졌다. 몽골의 요양(遼陽)에서 온 백호(百戶) 습성(習成)이 어머니의 소식을 정선 사람 김순(金純)에게 전했고, 김순이 이를 김천에게 알렸던 것이다.

포로가 된 후 김천의 어머니는 배가 고파도 먹지 못하고 추워도 입을 것이 없었으며, 낮에는 밭을 매고 밤에는 방아를 찧어 간신히 삶을 연명하였다. 이렇게 고생하는 어머니를 고려로 모셔 오기 위한 김천의 노력은 눈물겨울 정도였다. 뒷이야기에 따르면, 김천은 돈을 주고 어머니를 모셔 오려고 했으나, 이마저도 쉽지 않았다. 개경에 와서 백방으로 노력하다가 돈도 떨어지고 행색이 말이 아니게 되었는데, 다행히 같은 고향 사람인 승려 효연(孝緣)의 형인 천호(千戶) 효지(孝至)를 만나면서 김천은 뜻을 이룰 수 있었다. 어머니가 포로가 된 뒤 14년이 지나 그 소식을 듣고, 다시 그 후 6년이 지나서야 김천은 어머니가 계신 요양에 갈 수 있었다. 김천은 가까스로 어머니를 만나긴 하였으나 서로 알아보지 못했다 한다. 어머니가 자신을 소개하자 그제야 알아본 김천은 어머니를 부리던 주인에게 속전을 준 후에 겨우 어머니와 귀국할 수 있었다. 뒷날 동생 김덕린(金德麟) 역시도 가까스로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김천은 아우 김덕린과 함께 어머니에게 효를 다하면서 살았다 한다.

이 같은 상황은 비단 김천 모자 혹은 가족에게만 일어난 일은 아니었다. 사료 1에는 죽지는 않았지만 간신히 살아난 백성들과 굶주림 때문에 버려졌던 아이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사료 2에는 포로로 잡혀갔던 백성들의 고통스러운 종살이와 눈물겨운 상봉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 두 사료를 통해 고려와 몽골 간에 벌어진 30년 동안의 참혹한 전쟁이 끝난 후에도 백성들의 고통은 계속 진행형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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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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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몽항쟁사연구』, 윤용혁, 일지사, 1991.
편저
「몽고의 침입에 대한 항쟁」, 강진철, 국사편찬위원회, 1973.

관련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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