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월에 여러 도의 고을들이 난리를 겪어 피폐해졌다.삼세(三稅)
전세, 군포, 공납
이외의 잡세를 면제하고, 산성과 섬에 들어갔던 여러 도의 사람들을 모두 육지로 나오게 하였다. 그때에 공산성(公山城)
현 충남 공주시 산성동
에 들어갔던 백성 가운데 굶주려 죽은 자가 매우 많았는데, 늙은이와 어린이로 골짜기를 메울 정도였다. 심지어는 아이를 나무에 붙잡아 매어 놓고 가는 자도 있었다.『고려사절요』권17, 고종
'고종' 관련자료
김천(金遷)은 명주(溟州)
말에 몽골 병사가 습격해 어머니와 아우 김덕린(金德麟)을 잡아 갔다. 이때 김천의 나이 15세였는데, 밤낮으로 큰소리로 울다가 사로잡힌 사람 가운데 많은 이가 길에서 죽었다는 말을 듣고 상복을 입고 상을 마쳤다. 14년 후에 백호(百戶)
현 강원도 강릉 일대
고을의 아전이었는데, 어렸을 때 자(字)는 해장(海莊)이었다. 고종(高宗)
'고종(高宗)' 관련자료
병졸 100명을 거느린 무관
습성(習成)이 원(元)으로부터 와서 명주 사람을 저자에서 3일이나 부르니, 마침 정선(旌善) 사람 김순(金純)이 이에 응하였다. 습성이 말하기를, “김씨란 여인이 동경(東京)
요양(遼陽)
에서 말하기를, ‘나는 본래 명주 사람인데 해장이란 아들이 있다.’라고 하고 나에게 편지를 부탁했는데, 네가 해장을 아는가?”라고 물었다. (김순이) “나의 벗이다.”라고 하고 편지를 받아 김천에게 주었다. 편지에 이르기를, “나는 살아서 모주(某州) 모리(某里) 모가(某家)에 이르러 종이 되었는데, 굶주려도 먹지 못하고 추워도 입지 못한다. 낮에는 밭을 매고 밤에는 방아를 찧어 갖은 고달픔을 겪고 있으니 누가 나의 생사를 알리요?”라고 하였다. 김천이 편지를 보고 통곡하고, 언제나 식사를 할 때면 목이 메어 넘기지를 못했다.『고려사』권121, 「열전」34 [효우] 김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