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고려 시대사회고려의 사회 시책과 풍속

의창, 상평창, 대비원, 혜민국, 각종 보

현종(顯宗) 14년 윤 9월에 결정하기를, “무릇 여러 주현(州縣)의 의창(義倉)의 법은 도전정(都田丁)의 수 1)에 따라 거두어들인다.1과 공전(一科公田)1결(結)에 조(租) 3두(斗)로 하고, 2과(科)와 궁원전(宮院田)⋅사원전(寺院田)⋅양반전(兩班田)은 조 2두로 한다.3과군인 호정(軍人戶丁)기인 호정(其人戶丁)에서는 조 1두로 하는 것은 이미 규정이 있다. 혹 흉년이 되어 백성이 굶주리거든 이것으로써 급한 것을 구하고 가을에 이르러 환납(還納)하도록 하되 헛되이 소비하지 말라.”고 하였다.

『고려사』권80, 「지」34 [식화3] 상평의창 현종 14년 윤9월

○ (성종) 12년 2월에 양경(兩京)12목(牧)상평창(常平倉)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왕께서 말씀하시기를 “『한서(漢書)』 「식화지(食貨志)」에 ‘천승(千乘)의 나라는 반드시 천금(千金)의 값이 있어 해마다 풍흉에 따라서 조적(糶糴)을 행하되 백성에게 남음이 있으면 적게 거두고 백성이 부족하면 이를 많이 나누어 주었다.’라고 하였다. 그러니 이제 이 법에 의거하여 이를 행한다. 천금(千金)으로써 시가(市價)에 준하면 금(金) 1양(兩)의 값이 포(布) 44필이다. 즉 1,000금은 포 64만 필이 되며, 쌀로 바꾸면 12만 8,000석(石)이 된다. 이를 반으로 하면 쌀 6만 4,000석이 되니 5,000석을 서울로 올려서 경시서(京市署)에서 조적하게 하되, 대부시(大府寺)사헌대(司憲臺)에서 그 출납을 관리하게 한다. 그리고 나머지 5만 9,000석은 서경 및 주군(州郡)의 창(倉) 15개소에 나누어, 서경분사 사헌대(分司司憲臺)에 맡기고 주군의 창은 그 지방 관원에게 맡겨 이를 관리하여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구제하게 하라.”라고 하였다.

『고려사』권80, 「지」34 [식화3] 상평의창 성종 12년 2월

○ 동서 대비원(東西大悲院)【문종(文宗)이 정하여 사(使) 각 1인, 부사(副使) 각 1인, 녹사(錄事) 각 1인으로 하되 병과권무(丙科權務)로 하였다. 이속(吏屬)은 기사(記事) 2인인데, 의리(醫吏)로 충당하고 서자(書者) 2인으로 하였다. 충숙왕(忠肅王) 12년에 왕께서 말씀하시기를 “혜민국(惠民局)제위보(濟危寶)⋅동서 대비원은 본래 사람을 구제하기 위함인데, 지금 모두 폐하였으니 마땅히 다시 고치고 세워서 질병을 고치게 하라.”고 하였다.】

혜민국(惠民局)예종(睿宗) 7년 판관(判官) 4인을 두고 본업(本業=의업)과 산직(散職)을 서로 교체하여 임명하며 을과권무(乙科權務) 관직으로 할 것을 정하였다. 충선왕(忠宣王)혜민국을 사의서(司醫署)의 관할 아래 두었다가 공양왕(恭讓王) 3년 혜민 전약국(惠民典藥局)으로 고쳤다.】

○ 팔관보(八關寶)【문종(文宗)이 사(使) 1인은 4품 이상을 임명하고, 부사(副使) 2인은 5품 이상을 임명하며, 판관(判官)은 4인을 두도록 정하였다. (이상의 관원은 모두) 갑과권무(甲科權務) 관직으로 정하였다. 이속(吏屬)은 기사(記事) 2인, 기관(記官) 1인, 산사(算士) 1인이다.】

『고려사』권77, 「지」31 [백관2] 제사도감각색

1)도전정을 이해하는 시각으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토지 대장으로서 전적(田籍) 혹은 전안(田案)으로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군현 별로 모든 전정(田丁)에서 거두어들인 조세 징수권의 귀속처를 기록한 장부로 본 것이다.

○ 顯宗十四年閏九月, 判. 凡諸州縣義倉之法, 用都田丁數, 收斂. 一科公田一結, 租三斗, 二科及宮寺院兩班田, 租二斗. 三科及軍其人戶丁, 租一斗, 已有成規. 脫遇歲歉, 百姓阻飢, 以此救急, 至秋還納, 毋得濫費.

『高麗史』卷80, 「志」34 [食貨3] 常平義倉 顯宗14年閏9月

○ 十二年二月, 置常平倉于兩京十二牧. 敎曰, 漢食貨志, 千乘之國, 必有千金之價, 以年豐歉, 行糶糴, 民有餘, 則斂之以輕, 民不足, 則散之以重. 今依此法行之. 以千金, 准時價, 金一兩, 直布四十匹. 則千金, 爲布六十四萬匹, 折米十二萬八千石. 半之爲米六萬四千石, 以五千石, 委上京京市署糶糴, 令大府寺⋅司憲臺, 共管出納. 餘五萬九千石, 分西京及州郡倉一十五所, 西京委分司司憲臺, 州郡倉, 委其界官員管之, 以濟貧弱.

『高麗史』卷80, 「志」34 [食貨3] 常平義倉 成宗12年2月

○ 東西大悲院【文宗定, 使各一人, 副使各一人, 錄事各一人, 丙科權務. 吏屬, 記事二人, 以醫吏差之, 書者二人. 忠肅王十二年, 敎曰, 惠民局濟危寶東西大悲院, 本爲濟人, 今皆廢圮, 宜復修營, 醫治疾病.】

○ 惠民局【睿宗七年, 置判官四人, 以本業及散職互差乙科權務. 忠宣王爲司醫署所轄, 恭讓王三年, 改惠民典藥局.】

○ 八關寶【文宗定, 使一人四品以上, 副使二人五品以上, 判官四人, 甲科權務. 吏屬, 記事二人, 記官一人, 算士一人.】

『高麗史』卷77, 「志」31 [百官2] 諸司都監各色

이 사료들은 『고려사』 「식화지」 및 「백관지」에 나오는 내용으로, 굶주리는 백성에 대한 구휼이나 가난한 병자들을 위한 치료, 특정 용도에 맞는 재원 마련 등과 관련한 제도 및 기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를 통해 고려 시대 사회 보장 제도의 내용과 이를 위한 행정 기구 설치 및 관원 등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

먼저 사료 1은 고려 시대 운영된 의창(義倉)의 재정 마련과 관련한 규정을 담고 있다. 본래 고려의 의창은 고구려 때의 진대법(賑貸法)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으며, 수(隋)나라의 의창 제도를 받아들인 것이기도 하였다. 국초인 태조(太祖, 877~943, 재위 918~943) 때 빈민 구휼을 위해 흑창(黑倉) 제도를 운영한 것이 이에 해당한다. 986년(성종 5년) 7월 성종(成宗, 960~997, 재위 981~997)태조 대의 흑창 제도를 개혁하였다. 명칭을 의창으로 고치고 여러 주부(州府)에도 인호(人戶)의 많고 적음을 고려하여 이를 설치하였다. 의창을 운영하기 위한 재원 마련 방법은 사료 1에서 그 규정을 찾을 수 있다. 이에 따르면 1과 공전에서 결당 조 3두, 2과 공전과 궁원전⋅사원전⋅양반전에서는 결당 조 2두, 3과 공전과 군인 호정 및 기인 호정에서는 결당 조 1두를 거두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빈민을 구제할 수 있는 기본 재원 마련이 가능해졌다. 의창은 무신 정권기와 몽골과의 전쟁을 거치는 동안 폐지되었다가 공민왕(恭愍王, 1330~1374, 재위 1351~1374) 대에 복설이 결정되었다. 이 결정에 따라 1389년(창왕 1)양광도에 의창이 설치되었고, 얼마 후인 1391년(공양왕 3년) 개경 5부(部)에도 의창이 설치된 후 조선 시대까지 이어졌다.

사료 2는 상평창의 설치 목적 및 그 재원 마련 방식에 대해 알려 주는 기사이다. 상평창은 이 사료에 나타난 바처럼 『한서(漢書)』 「식화지」에도 보이는 제도로, 기원전 54년[전한(前漢) 선제(宣帝) 오봉(五鳳) 4] 전한(前漢)의 경수창(耿壽昌)이 건의하여 실시되었다. 목적은 시장의 곡물 가격을 국가에서 조절하려는 데 있었다. 곡물 가격이 하락할 때 쌀을 사들이고, 곡물 가격이 비싸지면 사들인 곡물을 풀어 물가를 조절하는 방식이었다. 993년(성종 12) 성종개경서경, 그리고 양주(楊州)⋅광주(廣州)⋅충주(忠州)⋅청주(淸州) 등 12목에 이러한 상평창을 설치하도록 하고, 쌀 6만 4,000석을 마련하였다. 이 중 5,000석은 경시서(京市署)에서 조적(糶糴)하게 하고 대부시(大府寺)사헌대(司憲臺)에서 이를 관장하게 하였다. 그 나머지 5만 9,000석은 서경 및 주⋅군의 창고에 두되, 서경의 것은 분사 사헌대(分司司憲臺)에서, 주⋅군의 창고는 그 지역을 관할하는 계수관(界首官)에서 관리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물가 조절을 통하여 빈약자를 돕기 위해 설치한 상평창은 그 활동이 크게 기대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설치 목적에 부응하지 못하였으며, 1371년(공민왕 20년) 복설이 결정된 후에도 바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사료 3은 고려 시대 환자를 돌보고 치료하기 위해 부처님의 대자대비(大慈大悲)한 마음에 입각해 설치한 의료 구제 기관에 관한 내용이다. 동서 대비원과 혜민국, 그리고 관련 재원을 마련하고 운영하기 위해 설치했던 제위보(濟危寶)와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다. 먼저 동서 대비원을 살펴보면, 언제 설치되었는지 분명하지는 않다. 다만 1036년(정종 2) 11월 기록에 동대비원(東大悲院)을 수리하여 굶주림과 추위, 그리고 질병으로 돌아갈 데 없는 이들을 거처하게 하면서 의복과 식량을 지급하였다고 전한다. 이로 볼 때 이미 정종(靖宗, 1018~1046, 재위 1035~1046) 대 이전에 대비원이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대비원의 관제가 재편된 것은 문종(文宗, 1019~1083, 재위 1046~1083) 대였다. 이때에 사(使) 각 1명, 부사(副使) 각 1명, 녹사(錄事) 각 1명을 병과권무(丙科權務)로 두었고, 이속(吏屬)으로 기사(記事) 2명을 의리(醫吏)로 충당하였으며, 서자(書者) 2명도 두었다.

혜민국도 사료 3에 보이는 바처럼 동서 대비원과 같은 기능을 가진 의료 기구라 할 수 있다. 다만 의료를 전담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혜민국은 대비원보다 늦은 시기인 1112년(예종 7년)에 이르러서야 설치되었다. 관원으로는 판관 4인을 두었으며 을과권무(乙科權務)로 하였다. 혜민국충선왕(忠宣王, 1275~1325, 재위 1298, 1308~1313) 대에는 사의서(司醫署)의 관할에 있다가, 1391년(공양왕 3년) 혜민전약국(惠民典藥局)으로 명칭이 바뀌기도 하였다.

사료 3에 보이는 제위보(濟危寶)제위포(濟威鋪)라고도 하였는데, 비교적 이른 시기인 963년(광종 14)에 이미 설치되었다. 빈민을 구제하고 질병을 치료하는 구호 의료 기관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보의 기본 재원 마련과 운영은 백성들에게 곡식을 빌려 주고 이자를 받는 이식(利息) 사업을 통해 이루어졌다. 일종의 공익 재단 성격을 띠었던 것이다. 문종 대에 이르러 다시금 관제가 정비되었는데, 이때 제위보에는 7품 이상의 부사 1명과, 녹사 1명을 두었으며, 뒤에 사 1명이 추가되었다. 다만 적임자가 임명되지 않아 운영에 차질을 빚기도 하였는데, 이는 제위보의 기능이 약화되었음을 의미하였다.

이처럼 제위보나 동서 대비원, 혜민국의 경우 가난한 백성이나 돈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는 빈약자에게 크게 도움이 되는 제도였으나, 재원 마련과 전담 관원의 미비로 기구가 축소되었다. 1325년(충숙왕 12년) 충숙왕(忠肅王, 1294~1339, 재위 1313~1330, 1332~1339)이 이들 세 기구의 운영이 무너졌으므로 다시 고쳐 세우라고 언급한 것은 이 같은 상황 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고려 태조 이래로 사회 복지 시책은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물가 조절을 통하여 빈민을 구제하거나, 굶주리고 병에 걸린 백성들에게 의복과 음식, 잠자리, 의료를 제공하고, 돈이 없는 백성들을 치료하는 등의 정책이 이에 해당하였다. 따라서 이들 사료는 고려의 기본 정책이 애민과 민본을 바탕으로 하였으며, 이를 실천하기 위해 각종 제도를 정비하였음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고려전기의 진휼정책 1」,『호서사학』12,박걸순,호서사학회,1984.
「고려전기의 진휼정책 2」,『호서사학』23,박걸순,호서사학회,1985.
「고려전기의 의창제도의 구조와 성격」,『고려사의 제문제』,박종진,삼영사,1986.
「고려시대 상평창에 관한 연구」,『논문집』6,서길수,淑明女子大學校 韓國政治經濟硏究所,1977.
「고려시대 민본사상의 성격 -진휼정책과 관련하여-」,『국사관논총』87,이석규,국사편찬위원회,1999.
「고려시대 견룡군의 설치와 임무」,『역사학보』165,村上四男,역사학회,2000.
「권무관록을 통해 본 고려시대의 권무직」,『국사관논총』26,최정환,국사편찬위원회,1991.
저서
『고려시기 재정운영과 조세제도』, 박종진,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0.
『고려전기의 재정구조』, 안병우,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2.

관련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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