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고려 시대사회농민과 천민의 봉기

망이⋅망소이의 난

○ (명종 6년(1176) 정월) 공주 명학소(鳴鶴所)의 백성 망이(亡伊), 망소이(亡所伊) 등이 자기 무리를 규합하여 스스로를 산행병마사라 칭하며 공주를 공격하여 무너뜨렸다.

○ 갑술일에 왕(명종)이 신중원(神衆院)에 행차하여 분향을 하고 지후(祗候) 채원부(蔡元富)와 낭장(郞將) 박강수(朴剛壽) 등을 보내 남부 지방의 적을 달랬으나 그들은 순종하지 않았다. 왕이 편전에서 여러 신하를 불러 놓고 적을 칠 계책을 물었다.

『고려사』권19, 「세가」19 명종 6년 1월

○ 을묘일에 남적집착병마사(南賊執捉兵馬使)가 아뢰기를 “적과의 싸움에서 실패하여 군사 상당수가 죽었으니, 승려들을 모아 군사력을 보강하십시오”라고 하였다.

『고려사』권19, 「세가」19 명종 6년 3월

○ 병술일에 망이의 고향인 명학소를 충순현으로 승격시키고 내원승(內園丞) 양수택(梁守鐸)을 현령(縣令)으로, 내시(內侍) 김윤실(金允實)을 현위(縣尉)로 임명하여 그 고을을 달래게 하였다.

○ 윤인첨(尹鱗瞻, 1110~1176)이 서경을 격파하고 조위총(趙位寵, ?~1176)을 붙잡아 죽인 다음 조정에 사람을 보내 승전을 보고하였다.

『고려사』권19, 「세가」19 명종 6년 6월

○ 9월 을사일에 장군 박순(朴純)과 형부 낭중 박인택(朴仁澤)을 파견하여 남적(南賊)을 타이르게 하였다.

『고려사』권19, 「세가」19 명종 6년 9월

○ 11월 초하루 임인일에 남적(南賊)의 두령 손청(孫淸, ?~1177)이 스스로 병마사(兵馬使)라 칭하였다.

『고려사』권19, 「세가」19 명종 6년 11월

○ 경자일에 대장군인 정세유(鄭世猷)와 이부(李夫)를 처치병마사(處置兵馬使)로 임명한 다음 좌도(左道)⋅우도(右道)로 파견하여 남적을 치게 하였다. 세유 등이 개국사(開國寺) 정문 앞에 모여 한 달이 넘도록 훈련을 한 뒤에 출발하였다.

『고려사』권19, 「세가」19 명종 6년 12월

(명종 7년(1177) 3월) 신해일에 망이 등이 홍경원(弘慶院)에 불을 지르고 절에 있던 승려 10여 명을 죽인 다음 주지승을 위협하여 다음과 같은 글을 가지고 상경토록 하였다. 대략 다음과 같다.

“우리 고향을 현으로 승격시키고 수령까지 배치하여 백성들을 보살피게 하더니, 다시 군사를 되돌려 토벌하러 와서 우리 어머니와 처를 잡아 가두니 그건 무슨 까닭인가? 차라리 싸우다가 죽을지언정 끝까지 항복하지 않을 것이며 반드시 개경까지 가고야 말겠다”

『고려사』권19, 「세가」19 명종 7년 3월 신해

○ 公州鳴鶴所民亡伊⋅亡所伊等, 嘯聚黨與, 自稱山行兵馬使, 攻陷公州.

○ 甲戌, 幸神衆院行香, 遣祗候蔡元富⋅郞將朴剛壽等, 宣諭南賊, 猶不從. 王引見群臣於便殿, 咨訪討賊之策.

『高麗史』卷19, 「世家」19 明宗 6年 1月

○ 乙卯, 南賊執捉兵馬使奏, 與賊戰不利, 士卒多亡, 請募僧以濟師.

『高麗史』卷19, 「世家」19 明宗 6年 3月

○ 丙戌, 陞亡伊鄕鳴鶴所, 爲忠順縣, 以內園丞梁守鐸爲令, 內侍金允實爲尉, 以撫之.

○ 尹鱗瞻攻破西京, 擒位寵殺之, 遣人來告捷.

『高麗史』卷19, 「世家」19 明宗 6年 6月

○ 九月乙巳, 遣將軍朴純⋅刑部郞中朴仁澤, 往諭南賊.

『高麗史』卷19, 「世家」19 明宗 6年 9月

○ 十一月壬寅朔, 南賊首孫淸, 自稱兵馬使.

『高麗史』卷19, 「世家」19 明宗 6年 11月

○ 庚子, 遣大將軍鄭世猷⋅李夫爲處置兵馬使, 分左右道, 往討南賊. 世猷等聚開國寺門前, 練兵閱月而後行.

『高麗史』卷19, 「世家」19 明宗 6年 12月

辛亥, 亡伊等焚弘慶院, 殺居僧十餘人, 逼令住持僧, 賫書赴京. 略云. 旣升我鄕爲縣, 又置守以安撫, 旋復發兵來討, 收繫我母妻, 其意安在? 寧死於鋒刃下, 終不爲降虜, 必至王京然後已.

『高麗史』卷19, 「世家」19 明宗 7年 3月 辛亥

이 사료는 고려 시대 특수 행정구역인 명학소에 살던 망이(亡伊)⋅망소이(亡所伊) 형제가 일으킨 농민 봉기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고려 시대 농민 봉기는 속현(屬縣)부곡(部曲) 지역 등 일반 군현에 비해 차별 받았던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그 중 망이⋅망소이 봉기는 그 규모가 충청도 일대를 장악할 정도로 컸고 1년 반 동안 지속되었다는 점에서 대표성을 지니고 있다. 특히 이 봉기는 차별받던 ‘소(所)’ 민이 중심이 되었다는 점에서 고려 시대 전형적인 농민 봉기의 성격과 함께 신분 상승 운동의 성격을 동시에 보여 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우선 사료의 내용을 토대로 망이⋅망소이 난의 경과를 살펴보면, 1176년(명종 6년) 1월 공주 명학소에서 망이⋅망소이가 무리와 함께 봉기해 공주를 함락하였다. 정부는 채원부(蔡元富)와 박강수(朴剛壽)를 보내 달랬지만 실패했고, 그 뒤 대장군 정황재와 장박인에게 3000명의 군사를 주어 이를 진압하려 했지만 패배하고 말았다. 이에 정부는 명학소를 충순현(忠順縣)으로 승격하고 수령을 파견하는 회유책을 썼지만, 망이 등은 응하지 않고 오히려 예산현을 공격해 감무를 살해하고 충주를 점령하였다. 이에 정부는 정세유(鄭世猷)와 이부(李夫)를 대장군으로 삼아 대대적 토벌을 전개하였고, 1177년(명종 7년) 1월 망이 등이 항복함으로써 봉기는 일단 진정된 듯하였다.

정부는 이들을 회유하기 위해 죄를 묻지 않고 오히려 곡식을 주어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한 달 뒤 망이 등은 재차 봉기해 가야사로 쳐들어갔으며, 3월에는 홍경원을 불태우고 승려들을 죽인 후 주지승에게 자신들의 의지를 담은 편지를 정부에 전달하게 하였다.

이들이 다시 봉기하게 된 것은 정부가 약속과 달리 다시 군대를 보내 그들의 가족들을 잡아 가두고 자신들을 토벌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죽을지언정 다시는 굴복하지 않고 개경까지 진격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들은 아주 일대를 함락하고 청주를 제외한 청주목 관내의 모든 군현을 점령하였다. 이에 정부는 강경책을 펼쳐 1177년 5월 충순현을 명학소로 다시 강등하고 군대를 파견해 강력히 토벌하였다. 결국 6월 망이가 항복을 청해 왔으며, 7월 망이⋅망소이 등이 정세유에게 붙잡혀 청주옥에 갇힘으로써 1년 반 동안의 봉기가 끝났다.

망이⋅망소이의 봉기가 일어난 직접적 계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봉기가 일어난 시기와 지역적 특수성을 살펴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첫째, 무신 집권 초기의 정치⋅경제⋅사회적 혼란이 배경이 되었다. 봉기가 일어난 1176년 1월은 무신 정권이 들어선 지 6년 정도 된 시기로, 집권 무신들은 12세기부터 고려 사회에 누적되어 온 수취 체제의 모순과 지방관의 수탈 문제에 대해 적절한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하였다.

이에 1174년(명종 4년) 서경 지역에서 조위총(趙位寵, ?~1176)이 봉기를 일으킨 후 전국적으로 농민 봉기가 확대되었다. 당시 집권자인 정중부(鄭仲夫, 1106~1179)는 조위총의 봉기 등 서북계 지방의 대형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서북 지방에서 항거가 한창일 때 남부 지방에서도 봉기가 일어났다. 정부는 서북계 지방의 봉기민을 ‘서적(西賊)’, 남부 지방의 봉기민을 ‘남적(南賊)’이라 칭했는데, 이렇듯 무신 집권기에는 중앙 정부의 지방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전국적으로 하층민의 봉기가 폭발적으로 발생하였다.

둘째, 과중한 수탈과 본관제⋅부곡제의 모순이 원인이었다. 고려 시대에는 그 사람이 사는 곳을 본관으로 하여 거주 이전의 자유를 제한하는 본관제를 시행했고, 한편으로는 부곡이라는 일반 군현과 구별되는 특수 행정구역을 설정하였다. 부곡에 사는 사람들은 신분적으로는 양인이었지만, 다른 군현의 양인들에 비해 차별 받았다. 이들은 국가에 세금을 부담하는 양인 신분이면서도 다른 군현에 거주하는 양인들과 달리 추가로 국가 직속지를 경작하거나 각종 수공업 제품을 생산하는 역을 부담해 경제적으로 열악했으며, 사회적으로도 천인과 같은 차별을 받았다.

명학소는 철을 생산한 ‘철소(鐵所)’나 숯을 생산한 ‘탄소(炭所)’로 추측되는데, 이와 같이 고려 시대 수공업 제품을 생산한 ‘’ 지역은 국가의 직접 수취 대상으로 특히 잦은 전쟁과 공사로 인해 과중한 수취에 시달려야만 하였다. 또한 본관제로 인해 다른 곳으로 이주하는 것도 불가능했기 때문에 부곡민의 신분은 벗어날 수 없는 굴레로 작용하였다. 명학소가 충순현으로 승격한 것을 계기로 봉기가 잠시 수그러든 것도 당시 그들의 가장 큰 바람 중 하나가 부곡제의 해체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망이⋅망소이의 항쟁은 과중한 수탈에 항거한 농민 봉기이면서도 본관제와 부곡제를 통한 차별에 항거한 신분 해방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봉기 경과를 통해 그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 명학민의 봉기가 1년 반이나 계속되면서 충청도 전역으로 확산된 것은 공주 주변 농민들의 지지와 호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망이 등이 산행병마사(山行兵馬使)로 스스로를 지칭한 것은 자신들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함과 동시에 그 세력이 상당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들은 순식간에 공주를 장악했으며, 중앙에서 파견한 장사 3000명을 무찌를 정도로 그 세력이 강하였다. 또한 손청 등의 다른 세력과 연합해 예산⋅충주까지 포함하는 광범위한 지역을 장악하는 등 하나의 군현 단위를 넘어 여러 군현에 걸쳐 다른 농민 봉기와 연결을 도모하였다.

둘째, 신분 해방운동에서 시작된 봉기가 정부 타도로 확대되었다. 봉기군의 기세에 놀란 정부는 명학소를 충순현으로 승격하고 반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망이 등과 강화를 맺었다. 정부는 이들을 회유한 후 주위의 반란 세력을 진압하는 한편 명학소민의 재봉기를 방지하기 위하여 이들 가족을 인질로 잡았다. 이에 분노한 봉기군은 이번에는 정부 타도를 내세우며 다시 일어났다.

셋째, 2차 봉기에서 가야사(덕산)를 침략하고 홍경원(직산)을 불태우며 10여 명의 승려를 살해했는데, 이는 당시 농민들이 정부⋅지방관뿐 아니라 지배층과 결탁하여 많은 토지와 노비 그리고 를 장악하고 있던 사원에 대해서도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넷째, 한때 청주목을 제외한 충청도 전역을 차지할 정도로 강한 세력을 지녔던 봉기군은 예산 지방의 손청과 이광 등 연합 세력의 패배로 인한 고립과 정부군의 대대적인 토벌 작전으로 진압되었다. 조위총의 난 등 ‘서적’을 진압한 정부는 ‘남적’에 대해 회유책에서 강경책으로 선회하여 대병력으로 봉기군을 압박하였다. 결국 손청 등의 연합 세력이 무너지면서 망이가 이끄는 봉기군도 정부군을 막아 내지 못하고 진압되었다.

망이⋅망소이의 봉기는 결국 실패했지만, 무신 집권기 가장 규모가 컸던 농민 봉기 중 하나로 장기간 지속되면서 농민들의 항쟁 의식을 자극하는 한편 지배층으로 하여금 제도 개선의 필요성을 느끼게 한 계기가 되었다. 망이⋅망소이 봉기를 도화선으로 폭발적으로 농민⋅천민 등 하층민의 봉기가 증가했으며, 특히 이 봉기를 통해 지배층은 부곡제 지역의 개편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고, 이는 이후 부곡 지역의 점차적 소멸에 영향을 미쳤다. 이와 같이 망이⋅망소이의 봉기는 무신 집권기 과도한 수탈로 인한 전형적인 농민 봉기임과 동시에 차별 받던 부곡 지역민의 신분 상승 운동이라는 측면에서 무신 집권기 대표적 농민 봉기 사례로 널리 활용되고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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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학소민 봉기의 결과와 역사적 의미」,『한국중세사연구』15,김호동,한국중세사학회,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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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촌사회와 농민⋅천민의 항쟁」,『새로운 한국사 길잡이(상)』,채웅석,지식산업사,2008.
「고려시대의 신분구조」,『고려사회사연구』,허흥식,아세아문화사,1981.
저서
『고려시대사』(수정⋅증보판)』, 박용운, 일지사, 2008.
『새로 쓴 5백년 고려사』, 박종기, 푸른역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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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회사연구』, 홍승기, 일조각, 2001.
편저
『고려 무신정권과 명학소민의 봉기』, 김갑동 외, 다운샘, 2004.

관련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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