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고려 시대사회농민과 천민의 봉기

김사미의 난

○ (명종 23년 7월) 이때에 남적(南賊)이 봉기했는데 그 중 심한 것이 운문(雲門)에 웅거한 김사미(金沙彌, ?~1194)초전(草田)에 자리 잡은 효심(孝心)으로, 이들은 망명한 무리를 불러 모아 주현(州縣)을 노략질하였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걱정하였다. 병자일에 대장군 전존걸(全存傑, ?~1193)에게 장군 이지순(李至純, ?~1196)⋅이공정(李公靖)⋅김척후(金陟侯)⋅김경부(金慶夫)⋅노식(盧植) 등을 이끌고 가서 남적을 토벌토록 하였다.

『고려사』권20, 「세가」20 명종 23년 7월

○ 8월 신축일에 이공정⋅김경부 등이 적을 공격하다가 패전하였다.

『고려사』권20, 「세가」20 명종 23년 8월

○ (11월) 임진일에 상장군 최인(崔仁)을 남로착적병마사(南路捉賊兵馬使)로, 대장군 고용지(高湧之)를 도지병마사(都知兵馬使)로 각각 임명하여 장군 김존인(金存仁)⋅사량주(史良柱)⋅박공습(朴公襲)⋅백부공(白富公)⋅진광경(陳光卿) 등을 이끌고 가서 남적을 토벌토록 하였다.

『고려사』권20, 「세가」20 명종 23년 11월

○ (12월) 정사일에 남적의 두령 득보(得甫)가 대궐 안에 들어와 편안히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청하자, 왕이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고향으로 돌려보내 병마사(兵馬使)의 처분에 맡기도록 하였다.

『고려사』권20, 「세가」20 명종 23년 12월

○ 時南賊蜂起, 其劇者金沙彌據雲門, 孝心據草田, 嘯聚亡命摽掠州縣. 王聞而患之. 丙子, 遣大將軍全存傑, 率將軍李至純⋅李公靖⋅金陟候⋅金慶夫⋅盧植等, 討之.

『高麗史』卷20, 「世家」20 明宗 23年 7月

○ 八月辛丑, 李公靖⋅金慶夫等, 擊賊敗績.

『高麗史』卷20, 「世家」20 明宗 23年 8月

○ 壬辰, 以上將軍崔仁爲南路捉賊兵馬使, 大將軍高湧之都知兵馬事, 率將軍金存仁⋅史良柱⋅朴公襲⋅白富公⋅陳光卿, 往討之.

『高麗史』卷20, 「世家」20 明宗 23年 11月

○ 丁巳, 南賊魁得甫, 詣闕請許安業. 命有司放還, 聽兵馬使區處.

『高麗史』卷20, 「世家」20 明宗 23年 12月

이 사료는 무신 집권기 발생한 김사미(金沙彌, ?~1194)와 효심(孝心)의 봉기 과정을 담고 있다. 무신 집권기에 들어 농민과 천민의 봉기가 전국적으로 일어났는데, 그 중 정부가 ‘남적(南賊)’이라고 지칭한 삼남 지방 각지의 봉기가 가장 크고 격렬하였다. 특히 김사미와 효심의 봉기는 그들이 연합 세력을 이뤄 싸웠다는 점과, 규모나 양상이 매우 크고 격렬했다는 점에서 무신 집권기 농민 봉기의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사료를 토대로 경과를 살펴보면, 1193년(명종 23년) 7월 운문(경상북도 청도)을 근거지로 한 김사미와 초전(울산)의 효심이 중심이 된 대규모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정부는 대장군 전존걸(全存傑, ?~1193)을 주장으로 삼아 이들을 토벌했지만 관군은 번번이 싸움에서 패하였다. 정부는 11월에 다시 상장군 최인(崔仁)을 남로착적병마사로 삼아 이들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이번에는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어 12월에 봉기군의 우두머리 가운데 한 명인 득보(得甫)가 항복했으며, 1194년(명종 24년) 2월에는 김사미도 항복하였다. 효심의 봉기군은 이후에도 계속 대항하였으나, 관군과의 밀성(밀양) 싸움에서 7000명이 전사하는 타격을 입고 결국 12월에 효심이 사로잡히면서 진압되었다.

김사미⋅효심의 봉기, 즉 운문⋅초전의 봉기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무신 집권기 남부 지방에서 일어난 농민 봉기의 연계선상에서 발생하였다. 무신 정변 이후 폭발적으로 발생한 농민 봉기는 처음에는 서북 지역에서 시작되어 점차 남부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정부에서는 남부 지방의 농민 봉기군을 ‘남적’이라고 불렀는데, 1176년(명종 6년)에 발생해 충청도 전역을 뒤흔든 망이(亡伊)⋅망소이(亡所伊)의 봉기가 대표적이다. 이후 잠잠했던 ‘남적’의 봉기는 이의민(李義旼, ?~1196) 집권 말기에 다시 발생해 1190년(명종 20년) 1월 경주에서 ‘남적’이 일어나 토벌군을 보냈다는 기록이 등장하고 있으며, 1193년(명종 23년) 2월에 관군이 추가 병력을 요청한 것으로 보아 경주와 그 인근에서 계속된 것으로 보인다.

김사미와 효심이 중심이 된 대규모 봉기는 1193년 7월 경상도에서 발생했는데, 이는 ‘남적’이라 일컬어지는 남부 지방 농민 봉기의 일환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봉기가 일어난 원인은 무신 집권기 다른 농민 봉기와 마찬가지로 12세기 이래 누적된 수취 체제의 모순과 지방관의 수탈에 대한 정부의 해결책 부재와 중앙 정부의 지방 통제력 약화, 그리고 본관제와 부곡제의 모순 등에서 찾을 수 있다.

둘째, 운문사라는 사찰이 중심 거점이 되었다는 점이다. 봉기의 주동자인 김사미는 운문사 외곽의 땅을 소작하는 농민의 우두머리였거나, 그 지역의 농민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김사미는 청도군 내에서 가장 큰 절인 운문사를 거점으로 인근의 농민과 유망민을 규합해 봉기군을 조직하고 초전을 근거지로 한 효심의 봉기군과 연합 전선을 구축하며 인근의 군현을 공격하였다. 무신 집권기 농민 항쟁에서는 이처럼 사찰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사찰이 권력자들과 마찬가지로 대토지를 소유하고 고리대를 통해 농민들을 수탈하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었다. 특히 운문산 일대는 건천⋅경주⋅영천⋅경산⋅청도 등과 산을 경계로 연결되어 있어 경상도 농민 봉기 세력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셋째, 이들은 고려를 부정하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의하면 전존걸을 주장으로 한 관군이 계속 봉기군에 패배한 것은, 당시 집권자인 이의민이 신라 부흥의 뜻을 가지고 토벌군 대장 중 하나인 자신의 아들 이지순(李至純, ?~ 1196)으로 하여금 몰래 봉기군에게 작전 기밀을 누설하고 군수품을 지원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이의민은 신라 부흥 혹은 자신의 권력을 확대할 목적으로 김사미 등의 봉기를 이용하였고, 김사미 등 또한 경주 출신인 이의민을 통해 신라 부흥을 실현하려고 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김사미의 봉기는 전형적 농민 봉기 성격 외에도 경주인의 신라 부흥 운동, 무인 세력의 권력 투쟁 등 정치적 성향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조선 시대 농민 봉기가 조세 수취를 둘러싼 지주와 전호 간의 대립에서 비롯한 것과는 차이를 보인다. 그 이유는 농민들의 불만이 지배층의 토지 탈점과 본관제와 부곡과 같은 차별적 군현 체제의 모순 등 지배 질서 자체에 있었기 때문이다. 김사미와 효심의 봉기가 진압된 이후에도 경주 지역과 강원도 삼척⋅강릉 일대 농민군이 연합 전선을 형성해 일으킨 신라 부흥 운동이 10여 년간이나 지속된 사실도 이를 뒷받침한다.

그러나 권력자 이의민과 봉기군 일부 세력의 연계 문제는 농민군 내부의 분열을 가져왔고, 결국 봉기는 실패하고 말았다. 김사미가 이의민과 연계한 사실이 알려지자 효심은 자신이 이끄는 봉기군과 함께 밀주(밀양)으로 돌아갔다. 이후 김사미의 봉기군은 내부 분열과 정부의 대규모 토벌군에 의해 고전하다, 결국 김사미가 참수되면서 진압되었다.

한편, 효심이 이끄는 농민군은 밀양 전투에서 7000명이 전사하는 등 관군에게 대패하면서 전력이 크게 약화되었고, 효심이 사로잡히면서 진압되었다. 농민 봉기를 이용하려던 이의민은 중앙 권력층 내부에서 위치가 불안해지면서 최충헌에게 정권을 빼앗기고 말았다. 봉기군 7000명의 죽음으로 막을 내리기는 했지만, 당시 군현의 인구가 1000~2000명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봉기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하게 해 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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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촌사회와 농민⋅천민의 항쟁」,『새로운 한국사 길잡이(상)』,채웅석,지식산업사,2008.
저서
『고려시대사』(수정⋅증보판)』, 박용운, 일지사, 2008.
『새로 쓴 5백년 고려사』, 박종기, 푸른역사, 2008.
『고려 무신정권기 농민⋅천민항쟁연구』, 이정신, 고려대학교 출판부, 1991.
『고려사회사연구』, 홍승기, 일조각,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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