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고려 시대사회농민과 천민의 봉기

만적의 난

(신종) 원년(1198)에 사노 만적(萬積, ?~1198) 등 여섯 명이 북산(北山)에 나무하러 갔다가 공사(公私) 노비들을 모아 놓고 말하기를, “우리나라에서는 경인년(庚寅年)계사년(癸巳年) 이래 고위 관리들이 천민과 노비에서 많이 나왔다. 장군과 재상이 어찌 타고난 씨가 따로 있겠는가? 때만 만나면 누구나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라고 어찌 뼈 빠지게 일만 하고 채찍 아래에서 고통만 당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여러 노비가 모두 옳은 말이라 여겼다. 이에 누런 종이 수천 장을 잘라서 모두 정(丁)자를 새겨서 표식으로 삼고 약속하기를, “우리들이 흥국사 회랑에서 격구를 하는 큰 마당[毬庭]으로 한꺼번에 모여들어 북을 치고 고함치면, 대궐 안에 있는 환관들도 반드시 호응할 것이며 관노들도 안에서 베어 죽일 것이다. 우리들은 성안에서 봉기하여 먼저 최충헌(崔忠獻, 1149~1219) 등을 죽인 후 각자 자기 주인들을 때려죽이고 노비 문서를 불태워 버리자. 이로써 이 나라에 다시는 천인이 없게 하면, 공경장상을 우리들이 모두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약속한 날짜가 되어서 모두 모였는데 그 수가 수백 명에 불과하자 일이 성사되지 못할 것을 염려해 이후 다시 보제사(普濟寺)에서 모이기로 약속한 후, “비밀이 지켜지지 않으면 일이 성공하지 못할 것이니, 누설되지 않게 조심하라”고 당부하였다.

그러나 율학박사(律學博士) 한충유(韓忠愈)의 가노(家奴) 순정(順貞)이 한충유에게 밀고했고, 한충유가 최충헌에게 고발하였다. 마침내 만적 등 100여 명을 체포하여 강물에 던졌다. 고발한 공으로 한충유에게 합문지후(閤門祗候) 벼슬을 주었으며, 순정에게는 백금 80냥을 주고 면천시켜서 양민으로 만들었다. 나머지 무리들은 모두 다 죽일 수 없어서 죄를 불문에 부치겠다는 조서를 내렸다.

『고려사』권129, 「열전」42 [반역3] 최충헌

元年, 私僮萬積等六人樵北山, 招集公私奴隷謀曰, 國家自庚癸以來, 朱紫多起於賤隷. 將相寧有種乎? 時來則可爲也. 吾輩安能勞筋骨, 困於捶楚之下?

諸奴皆然之. 剪黃紙數千, 皆鈒丁字, 爲識約曰, 吾輩自興國寺步廊至毬庭, 一時群集鼓噪, 則在內宦者必應之, 官奴等誅鋤於內. 吾徒蜂起城中, 先殺崔忠獻等, 仍各格殺其主焚賤籍. 使三韓無賤人, 則公卿將相, 吾輩皆得爲之矣.

及期皆集以衆, 不滿數百, 恐不濟事, 更約會普濟寺令曰, 事不密則不成, 愼勿泄.

律學博士韓忠愈家奴順貞, 告變於忠愈, 忠愈告忠獻. 遂捕萬積等百餘人, 投之江. 授忠愈閣門祗候, 賜順貞白金八十兩, 免爲良. 以餘黨不可悉誅詔不問.

『高麗史』卷129, 「列傳」42 [叛逆3] 崔忠獻

이 사료는 최충헌(崔忠獻, 1149~1219)의 사노비 만적(萬積, ?~1198)이 난을 일으키려고 모의했다가 발각되어 실패한 사건을 담고 있다. 무신 집권기 천민의 봉기와 관련해 가장 많이 인용되는 사건이다. 특히 당시 최고 집권자인 최충헌의 사노비인 만적이 신분 해방과 함께 정권 장악을 계획했고, 여기에 참여한 노비들이 많았다는 점에서 고려 사회를 이해하는 데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우선 만적이 난을 일으킨 1198년(명종 26년)은 최충헌이 이의민(李義旼, ?~1196)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지 2년이 되는 해이다. 1170년(의종 24년) 무신 정변이 일어난 후 계속되는 정권 쟁탈전으로 인해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크게 약화되면서 전국적으로 농민과 천민의 봉기가 일어났다. 이런 사회 혼란 속에서 하극상의 풍조가 만연해지면서 고려의 신분제는 크게 동요하였다. 특히 천민 출신으로 알려진 이의민이 무신 정권의 최고 집권자가 된 사실은 천민들의 신분 상승 욕구를 자극하였으며, 정권 장악의 본보기가 되었다.

또한 당시는 최충헌 정권의 초기로 아직 권력이 안정되지 못한 상태였다. 무인 간의 권력 쟁탈 과정에서 사병으로 동원되었던 노비들은 공을 세워 신분을 상승할 수도 있었지만 처참히 죽음을 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당시의 정치사회적 상황 외에도 이와 같은, 언제 올지 모르는 죽음의 공포 또한 만적이 난을 모의하는 데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다음으로, 만적개경에 사는 최고 권력자의 솔거노비(率居奴婢)였다. 고려 시대 노비는 최하위 신분으로 ‘일천즉천(一賤卽賤)’의 원칙에 의해 부모 중 한 명만 노비라도 노비가 되었으며, 사유 재산으로 분류되어 인신의 자유가 구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노비들이 모두 같은 처지에 있지는 않았다. 노비는 소유주에 따라 국가에 소속된 공노비, 개인에 소속된 사노비로 나뉘고, 사노비의 경우 주인과 함께 사는 솔거노비와 주인과 따로 살며 주인의 땅을 경작하는 외거노비(外居奴婢)로 나뉜다.

사노비는 그 수나 역할에 있어 고려 노비 중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는데, 이 중 외거노비는 주인과 따로 거주하면서 일정한 ‘전조(田租)’와 ‘신공(身貢)’만 바치면 비교적 자유롭게 살 수 있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는 양인 전호와 다르지 않았다. 외거노비인 평량(平亮, ?~1188)이 재산을 모아 신분을 상승할 수 있었던 예를 보면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에 반해 주인과 함께 사는 솔거노비는 의식주를 주인에게 의탁해야 했으며, 주인에 의해 행동의 자유가 최대한 억제되었고, 노동은 최대한 수취되었다. 주인의 채찍 아래서 더 이상 고통을 참고 있을 수 없다고 만적 등이 주장한 것은 대개 솔거노비의 현실적 처지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그들의 사회 경제적 지위는 노비 가운데서도 가장 열악하였다. 만적의 난을 주도한 노비들이 대부분 솔거노비였다는 사실에서 이러한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한편, 만적개경의 최고 지배층의 노비였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개경은 왕을 비롯해 최고 지배층이 거주하던 곳으로, 개경의 노비들은 주인집의 여러 가지 잡무를 담당하거나 토지를 경작하였다. 그들은 고위층의 주인과 함께 살았기 때문에 정치 상황이나 사회 상황의 변화에 대한 파악이 빨랐으며, 다른 지방 노비들보다 사회의식도 상당히 높았다. 또한 가까이서 주인이 누리는 권력의 힘을 보았으므로 이에 대한 동경도 컸을 것이다. 만적의 난을 비롯한 대다수 노비 항쟁이 수도 개경에서 발생한 것을 통해 이러한 점을 추측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 사료는 당시 노비들의 사회 인식의 한 단면을 보여 준다. 우선, 만적의 연설을 통해 그가 신분 해방과 정권 장악을 목표로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무신 집권기 노비들 중에서는 공을 세우거나 주인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고 고위 관직에 오른 경우도 있었다. 또한 드물지만 노비 평량과 같이 경제력을 이용해 신분을 상승한 사람도 있었으며, 오히려 사료의 노비 순정과 같이 반역죄를 밀고한 공으로 자신의 신분을 상승하는 것이 일반적인 방법이었다.

그런데 만적은 봉기를 통해 직접적으로 자신의 신분을 상승시키고자 하였다. 만적과 함께 처형된 100여 명의 노비들은 단순히 노비에서 벗어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신분제를 철폐하고자 했으며, 나아가 정권 장악을 기도하였다. 봉기 계획에서 도중에 이탈한 노비들도 침묵을 통해 이러한 인식에 동조하였다. 만적 등이 봉기를 모의하면서 ‘정’자가 적힌 누런 종이 수천 장을 만든 점과 정부가 만적 등 100여 명을 처형하고도 나머지 노비들의 죄를 불문에 부친 점으로 미루어, 처음의 봉기 계획에 찬성했으나 도중에 이탈한 노비들이 상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목숨이 날아갈 것이 두려워 도중에 이탈했지만 순정과 같이 밀고를 하면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다는 것은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노비가 봉기에서 이탈했을지언정 밀고하지 않고 침묵을 선택하였다. 이는 당시 노비들의 사회의식이 상당한 수준에 있었음을 보여 주는 동시에 봉기를 일으키지 않았던 많은 하층민의 인식 또한 만적 등과 다르지 않았음을 짐작하게 해 준다. 이는 이들의 봉기가 국가 지배 질서의 모순에서 발생한 것이며, 신분제를 부정하는 피지배층의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음을 보여 준다. 특히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가"라는 그의 한 마디는 무신 집권기 신분 동요 상황과 대다수 하층민의 사회 인식을 대변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고려 노비의 법제적 지위」,『국사관논총』17,이재범,국사편찬위원회,1990.
「향촌사회와 농민⋅천민의 항쟁」,『새로운 한국사 길잡이(상)』,채웅석,지식산업사,2008.
「고려시대의 신분구조」,『고려사회사연구』,허흥식,아세아문화사,1981.
「평량의 몸부림과 만적의 반항」,『한국사시민강좌』39,홍승기,일조각,2006.
저서
『고려 무신정권기 농민⋅천민항쟁연구』, 이정신, 고려대학교 출판부, 1991.
『고려 귀족사회와 노비』, 홍승기, 일조각, 1983.
『고려사회사연구』, 홍승기, 일조각, 2001.

관련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링크연결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