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고려 시대사회농민과 천민의 봉기

제주 농민의 봉기

○정축(丁丑)에 탐라 안무사(耽羅安撫使) 조동희(趙冬曦)가 조정에 들어왔다. 탐라는 멀고 험한 곳이어서 공전(攻戰)이 미치지 못하는 바이지만 토지가 기름져서 경비가 나오는 곳이었다. 이보다 앞서서는 나라에 바치던 공물이나 세금이 번거롭지 않고 백성들이 생업을 즐길 수 있었다. 최근 들어 관리들이 불법을 저지르므로 도적의 우두머리 양수(良守) 등이 모반을 하여 수령을 축출하였다. 왕이 조동희에게 명하여 부절(符節)을 가지고 가서 왕의 뜻을 전하도록 하였더니, 적들이 스스로 항복하였다. 양수 등 2인과 그 무리 5인을 베고, 나머지는 모두 곡식과 비단을 주어 위로하였다.

『고려사』권18, 「세가」18 의종 22년 11월 정축

탐라(耽羅)의 이러한 노래는 아주 비루하지만, 백성의 풍속이 담겨 있어 세태의 변화를 알 수 있다.

거꾸러진 보리 이삭 그대로 두고

가지 생긴 삼도 내버려 두었네.

청자와 백미를 가득 싣고서

북풍에 오는 배만 기다리고 있구나.

탐라는 지역이 좁고 백성들은 가난하였다. 과거에는 전라도에서 자기(瓷器)와 쌀을 팔러 오는 장사꾼이 때때로 왔으나 숫자가 적었다. 지금은 관가와 사가(私家)의 소와 말만 들에 가득하고 개간은 없는 데다가 오가는 관개(冠蓋)가 북[梭]같이 드나들어서 전송과 영접에 시달리게 되었으니, 그 백성의 불행이었다. 그래서 여러 번 변(變)이 생긴 것이다.

『익재난고』권4, 「시」 작견곽충룡

○ 丁丑, 耽羅安撫使趙冬曦, 入覲. 耽羅險遠, 攻戰所不及, 壤地膏膄, 經費所出. 先是, 貢賦不煩, 民樂其業, 近者, 官吏不法, 賊首良守等, 謀叛, 逐守宰. 王命冬曦, 持節宣諭, 賊等自降. 斬良守等二人, 及其黨五人, 餘皆賜穀帛, 以撫之.

『高麗史』卷18, 「世家」18 毅宗 22年 11月 丁丑

○耽羅此曲, 極爲鄙陋, 然可以觀民風知時變也.

從敎壟麥倒離披, 亦任丘麻生兩歧. 滿載靑瓷兼白米, 北風船子望來時.

耽羅, 地狹民貧. 往時全羅之賈販, 瓷器稻米者時至而稀矣. 今則官私牛馬蔽野, 而靡所耕墾, 往來冠蓋如梭, 而困於將迎, 其民之不幸也. 所以屢生變也.

『益齋亂藁』卷4, 「詩」 昨見郭翀龍

이 사료들은 탐라(耽羅), 즉 지금의 제주도 백성들이 중앙 정부에서 파견한 관원의 가혹한 징세와 징발에 반발하여 일으킨 농민 봉기와 관련한 내용이다. 탐라인의 생활상과 처지가 담겨 있다.

사료 1은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의 불법과 수탈이 잇따르자 탐라인들이 난을 일으켰음을 알려 준다. 사료 2는 고려 후기에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이 관료들의 빈번한 출입이나 목장 운영으로 인하여 개간지가 축소되는 등 생활이 어려워지자 탐라인들이 변란을 자주 일으키게 되었다는 내용의 노래를 기록하고 그 해설을 부기한 것이다. 여기에 실린 「탐라(耽羅)」는 악곡에 해당하는데, 백성들의 참담한 생활상을 시로 읊은 것이다.

탐라는 신라 때부터 독립 왕국으로서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고려 건국 후에는 925년(태조 8) 11월부터 지역 특산물을 뜻하는 방물(方物)을 바치는 등 고려 왕조의 울타리에 속하고자 하였다. 이에 태조는 938년(태조 21) 12월 탐라의 태자 말로(末老)가 오자 그에게 성주 왕자(星主王子)의 작위를 내렸다. 1011년(현종 2) 9월에는 탐라에서 주군(州郡)에 내려 주는 주기(朱記)를 간청하자 이를 허락한 바 있었다. 이후 매년 방물을 바쳤으며, 1052년(문종 6) 3월에는 탐라국에서 매년 바치는 귤의 양을 100포(包)로 정하기도 하였다.

이 같이 탐라는 고려의 군현이 되고자 노력하였고, 고려 조정에서도 수시로 작위를 내려 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자 하였다. 그러나 사료 1에 보이는 바처럼 탐라인에 대한 수탈이 심해 반발을 사기도 하였다. 1168년(의종 22) 11월의 기록을 보면 탐라 안무사(耽羅安撫使) 조동희(趙冬曦, ?~1170)가 파견되어 관리들의 불법을 없애고 백성을 위로한 적이 있다. 당시 탐라인 양수(良守, ?~1168) 등이 모반을 일으켜 수령을 쫓아내는 일이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일종의 민란에 해당하는 사건이었다. 이 일은 주도자인 양수 등이 처형되면서 일단락되었으나, 탐라인들은 관리들의 수탈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얼마 후인 1187년(명종 16) 7월 실제 모반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으나 탐라가 모반을 한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이때 고려 정부에서는 안무사(按撫使)를 파견하고 현령을 교체하는 등 민첩하게 대응하였다. 1202년(신종 5) 10월에는 실제로 번석(煩石, ?~1202)⋅번수(煩守, ?~1202) 등이 탐욕스러운 지방관의 교체를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키자, 고려 정부는 소부 소감(少府少監) 장윤문(張允文)과 중랑장(中郞將) 이당적(李唐績)을 보내어 진압하였다. 이러한 민란 외에도 몽골과 전쟁을 벌이던 대몽 항쟁기에 진도에서 삼별초를 이끌던 김통정(金通精, ?~1273)이 진도가 함락 당한 후 탐라로 들어가서 저항을 지속하기도 하였다. 이에 1273년(원종 14) 4월 김방경(金方慶, 1212~1300)은 원(元)나라의 무장인 흔도(忻都)⋅홍다구(洪茶丘, 1244~1291)와 함께 이들을 쳐서 항복을 받아 내었다. 이후 탐라에는 탐라국 초토사(耽羅國招討司)가 생겼다가 탐라국 군민도 다루가치 총관부[耽羅國軍民都達魯花赤摠管府], 즉 탐라총관부가 설치되었는데, 이는 원나라가 탐라를 직접적으로 지배하기 위하여 설치한 관부였다.

이후 탐라는 원나라로부터 다양한 형태로 지배를 받았다. 1276년(충렬왕 2) 8월 원나라는 타라치[塔刺赤]를 탐라의 다루가치[達魯花赤]로 삼아 말 160필을 기르도록 하였다. 이로써 탐라는 원나라 황실의 목장지가 되었다. 또한 탐라에서 진주를 채취하기도 하였는데, 원하는 만큼 진주를 거두지 못하자 백성들이 가지고 있던 진주 100여 개를 빼앗아 간 임유간(林惟幹)과 같은 이들도 있었다. 원나라에 가져갈 향장목(香樟木)을 탐라에서 구해 가기도 하였으며, 탐라의 소고기를 원나라에 바친 사례도 있었다. 이 외에도 탐라는 원의 유배지가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고려는 탐라 경영을 포기하지 않았다. 예컨대 1294년(충렬왕 20)에 이르러 충렬왕(忠烈王, 1236~1308, 재위 1274~1308)은 탐라를 고려에 돌려줄 것을 청하여 원나라 세조(世祖, 1215~1294, 재위 1260~1294)로부터 허락을 받았다. 그 직후 다시 탐라를 되찾았다면서 충렬왕은 탐라 왕자 문창유(文昌裕, ?~1285)와 성주(星主) 고인단(高仁旦)에게 물품을 선물로 내려 위로하였다. 그러나 원나라는 탐라에서의 목장 경영을 지속하는 한편 1296년(충렬왕 22) 2월에는 탐라 목축사(耽羅牧畜事)로 단사관(斷事官) 무르치[木兀赤]를 파견하였다. 1301년(충렬왕 27)에는 탐라총관부를 없애고 군정을 담당할 만호부를 세워 달라는 충렬왕의 요청을 받아들여 군민 만호부(軍民萬戶府)를 설치하였다. 이렇듯 원나라는 탐라를 여전히 직⋅간접적으로 지배하였다.

이런 가운데도 탐라인에 대한 수탈은 끊이지 않았다. 사료 2에 보이는 바처럼 탐라인들은 관리들을 맞고 보내는 데 동원되느라 개간도 하지 못해 생계가 어려워져 곤란을 겪고 있었다. 예컨대 1318년(충숙왕 5) 4월에는 대호군(大護軍) 장공윤(張公允)과 제주 부사(濟州副使) 장윤화(張允和)의 지나친 탐욕 때문에 민란이 일어났다. 이제현이 「탐라」라는 악곡의 시가 탐라인들의 풍속과 세태 변화를 기록한 내용이라고 설명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사료 1과 사료 2는 1168년(의종 22)에 발생한 탐라인의 봉기와 이제현이 이러한 변란을 바라보면서 내린 평가가 담겨 있다. 섬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있던 탐라인들이 관리의 지나친 수탈에 시달리고, 더 나아가 고려와 원의 다양한 지배를 받던 과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고려 무신정권시대 재지세력과 농민항쟁」,『한국중세사연구』창간호,김호동,,1994.
「고려무인정권의 몰락과 삼별초의 천도항몽」,『원광사학』4,나종우,원광대학교 사학회,1986.
「12, 13세기 농민항쟁의 원인에 대한 고찰」,『동방학지』69,박종기,연세대 국학연구원,1990.
「무인정권 하의 농민항쟁」,『한국사 시민강좌』8,박종기,일조각,1991.
「고려 대몽항쟁기의 민란에 대하여」,『사총』30,윤용혁,고려대학교 사학회,1986.
저서
『고려의 무인정권』, 김당택, 국학자료원, 1999.
『고려 무인정권과 지방사회』, 신안식, 경인문화사, 2002.
『고려 삼별초의 대몽항쟁』, 윤용혁, 일지사, 2000.
편저
「농민천민의 난」, 변태섭, 국사편찬위원회, 1973.

관련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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