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고려 시대문화불교 사상과 신앙

태조의 개태사 화엄법회소

고려 태조 19년(936)에 백제를 정벌하여 큰 승리를 거두자, 하내(河內) 30여 군(郡)과 발해국(渤海國) 사람들이 모두 귀순하였다. 드디어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개태사를 창건하고, 친히 원문(願文)을 지어 손수 이를 썼다.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백성들이 백 가지 근심을 만나니, 많은 고통을 이겨 낼 수 없었습니다. 병난(兵亂)이 경내(境內)를 감싸 재난이 진한(辰韓)을 시끄럽게 하니, 사람들은 의탁해 살 길이 없고 가옥들은 온전한 담이 없었습니다. 운운. 하늘에 고하여 맹세하기를, ‘큰 간악한 무리를 섬멸, 평정하고 백성을 도탄에서 건져 농사와 길쌈을 제 고장에서 마음대로 할 수 있게 하겠나이다.’ 하였습니다. 위로 부처님의 힘에 의탁하고, 다음으로는 하늘과 신령의 위엄에 의지하여, 20여 년간의 수전(水戰)과 화공(火攻)으로 몸소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천릿길을 달려 남쪽을 치고 동쪽을 정벌하여 친히 무기를 베개로 삼았습니다. 병신년(936) 가을 9월 숭선성(崇善城) 인근에서 백제의 군사와 대진할 때 한 번 소리치니 흉광(兇狂)의 무리가 무너졌고, 두 번째 북을 울리니 역당(逆黨)이 얼음 녹듯 소멸되어 개선의 노래가 하늘에 떠 있고, 환호의 소리는 땅을 뒤흔들었습니다. 운운. 들판의 도적과 산골의 흉도들이 자신들의 죄과를 뉘우치며 새사람이 되겠다고 곧 귀순해 왔습니다.

모(某)는 그 뜻을, 간사한 자를 누르고 악한 자를 제거하며, 약한 자를 구제하고 기울어진 것을 붙들어 일으키는 데 두었으므로, 털끝만큼도 침범하지 않고 풀 한 잎도 상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운운. 부처님의 붙들어 주심에 보답하고, 산천 신령의 도와주심을 갚으려고 특별히 담당 관사(官司)에 명하여 불당을 창건하고는, 이에 산의 이름을 천호(天護)라 하고, 절의 이름을 개태(開泰)라고 하나이다. 운운. 원하옵건대 부처님의 위엄으로 덮어 주고 보호하시며, 하느님의 힘으로 붙들어 주옵소서.”

『신증동국여지승람』권18 「충청도」 연산현 불우 개태사

高麗太祖十九年, 征百濟大克, 獲河內三十餘郡及渤海國人皆歸順. 乃命有司 創開泰寺, 親制願文手書.

略曰. 生遇百罹, 未堪多艱. 兵纏土郡, 災擾辰韓, 人莫聊生, 室無完堵, 云云. 證天有誓, 剗平巨孽拯塗炭之生民, 恣農桒於鄕里. 上憑佛力, 次仗玄威, 二紀之水擊火攻, 身蒙矢石, 千里之南征東討, 親枕干戈, 丙申秋九月, 於崇善城邉, 與百濟兵交陣, 一呼而兇狂瓦觧, 再鼓而逆黨氷消, 凱唱浮天歡聲動地, 云云. 萑蒲寇竊溪洞微兇改悔, 自新尋懷歸順.

某也志在搦奸除惡濟溺扶傾, 不犯秋毫, 不傷寸草, 云云. 荅佛聖之維持, 酬山靈之賛助, 特命司局, 刱造蓮宮, 乃以天護爲山號, 以開泰爲寺名, 云云. 所願佛威庇護, 天力扶持, 云云.

『新增東國輿地勝覽』卷18 「忠淸道」 連山縣 佛宇 開泰寺

이 사료는 고려 태조(太祖, 재위 918~943)가 936년(태조 19년) 후백제를 정벌한 뒤 연산에 개태사를 짓기 시작하여, 940년(태조 23년) 12월에 완공한 뒤 올린 법회를 위해 직접 쓴 화엄법회 소문(疏文)의 일부이다.

그 내용을 보자. 먼저 태조는 고려 건국 후 전쟁과 재난으로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기 위해 하늘에 간악한 무리를 평정하고 백성을 도탄에서 건져 평화롭게 살게 할 것을 발원하고 있다. 그 후 20여 년간 부처의 힘과 하늘과 신령의 위엄에 힘입어 위기를 극복하고, 936년 숭선성(崇善城)에서 후백제군과의 마지막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음을 서술하고 있다. 그에 더하여 흉악한 무리들이 새사람이 되겠다고 귀순해 왔으며 태조 자신도 간사한 자를 누르고 악한 자를 제거하며, 약한 자를 구제하고 기울어진 것을 바로잡아 일으키고자 노력하였고, 마침내 부처님의 가호와 산천 신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불당을 창건하게 되었는데, 산의 이름은 ‘천호(天護)’, 절 이름은 ‘개태(開泰)’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나타난 개태사 창건의 목적은 전쟁으로 인해 죽은 자들을 부처의 힘으로 위로하고 백성들의 복을 빌고자 하는 데 있었다. 이 또한 산천의 신에 대한 감사 등이 담겨 있다. 그렇다면 개태사는 태조 왕건(王建)이 후백제를 치고 삼한일통을 기념하여 세운 개국 사찰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개태사는 화엄법회를 올린 곳으로서, 화엄종으로 시작된 절임을 알 수 있다. 부처의 가르침, 즉 교리를 중시하는 교종에서 화엄(華嚴)의 가르침은 대립하고 항쟁을 거듭하는 현실을 정화하고, 대립의 마음을 없앰으로써 마음을 통일하게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화엄은 왕조 국가에서 왕권의 정치질서를 정신적으로 뒷받침하는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개태사는 창건 동기와 그 목적을 연관시켜 볼 때 화엄 도량으로 정해진 것이라 볼 수 있고, 태조는 화엄법회 소문을 친히 쓴 것이다.

더욱이 태조 사후 어진을 모시는 영전(影殿)이 설치되면서 이곳은 대표적인 태조진전 사원이 되었다. 이곳에는 태조의 옷 한 벌과 옥대 1요(腰)를 보관하고는 기일마다 향을 올렸다. 특히 1362년(공민왕 11년)에는 공민왕이 이곳 개태사에서 이인복(李仁復, 1308~1374)에게 강화도 천도 여부를 점치게 한 바 있다. 당시 불길하다는 점괘로 인해 천도는 중지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듬해에 재차 보내 천도 여부를 점친 결과는 길하다고 나왔다.

이 같은 화엄법회 소문의 내용 등을 볼 때 태조는 후삼국 통일 이후 교종의 화엄 사상을 고려 왕조의 안정과 복을 구하기 위한 중요한 요소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사료는 태조가 고려 왕조 운영의 한 축으로 불교를 중시하고 화엄 사상을 통해 후백제 지역을 포함한 고려 왕조 내 백성들의 조화와 통일을 꾀하고자 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하겠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개태사의 창건과 그 동향」,『백산학보』83,김갑동,백산학회,2009.
「고려태조 친제「개태사화엄법회소」의 연구」,『가산이지관스님화갑기념논총 한국불교문화사상사』(권상),양은용,논총간행위원회,1992.
「936년 고려의 통일전쟁과 개태사」,『한국학보』114,윤용혁,일지사,2004.
저서
『고려의 후삼국 통일과 후백제』, 김갑동, 서경문화사, 2010.

관련 이미지

개태사

관련 사이트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링크연결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