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균여
)은 북악(北岳)의 법통을 이으신 분이다. 옛날 신라 말 가야산 해인사에 두 분의 화엄종 사종(司宗)이 있었다. 한 분은 관혜공(觀惠公)으로 후백제 견훤(甄萱)
의 복전(福田)
의 복전이 되었다. 두 분은 (견훤
과 왕건
의) 신심(信心)을 받아 불전에서 인연을 맺었는데, 그 인연이 이미 달라졌으니 마음이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 그 문도에 이르러서는 물과 불 같은 사이가 되었고 법미(法味)
'균여' 관련자료
'견훤(甄萱)' 관련자료
불교에서 신앙의 대상인 부처 또는 승려의 호칭
이 되었고, 다른 한 분은 희랑공(希朗公)인데 우리 태조 대왕
'태조 대왕' 관련자료
'견훤' 관련자료
'왕건' 관련자료
부처가 설법한 진리의 본질
도 각기 다른 것을 받았다. 이 폐단을 없애기 어려운 것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었다. 당시 세상 사람들은 관혜공의 법문을 남악(南岳)이라 하고, 희랑공의 법문을 북악(北岳)이라 일컬었다. 스님은 항상 남악과 북악의 종지(宗旨)가 서로 모순되며 분명해지지 않음을 탄식하여, 많은 분파가 생기는 것을 막아 한 길로 모이기를 바랐다. 그래서 스님은 수좌 인유(仁裕)와 가까이 사귀어 명산을 유람하고, 절을 왕래하면서 불법의 북을 울리고, 불법의 깃대를 세워, 불문의 젊은 학자들이 자신을 따르도록 하였다. ……(중략)……
스님은 근원이 나누어져 다른 것임에도 어긋나고 뒤섞인 것이 상당히 많다고 생각하여 글이 번잡한 것은 요점만 추려서 깎아내고, 뜻이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은 것은 상세히 궁구하여 그 뜻을 표현했다. 모두 불타의 경과 보살의 논(論)을 인용해서 잘못을 정정했으니 한 시대의 성스러운 교화를 다 참작했던 것이다. 나라에서 왕륜사(王輪寺)에 선석(選席)을 베풀고 불문의 급제를 선발할 때 우리 스님의 의리(義理)의 길을 정통으로 삼고 나머지는 방계로 했으니, 모든 재주와 명망 있는 무리들이 어찌 이 길을 따르지 않으랴. 크게는 지위가 왕사
, 국사
에까지 이르렀고, 작게는 위계(位階)가 대사(大師)⋅대덕(大德)에 이르렀으니, 몸을 일으켜 출세하고 자취를 나타낸 이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왕사' 관련자료
'국사' 관련자료
『균여전』, 입의정종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