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고려 시대문화도교와 풍수지리설

김위제의 풍수지리설과 남경

김위제(金謂磾)는 숙종 1년(1096)에 위위승동정(衛尉丞同正)에 올랐다. 신라 말에 도선(道詵)이라는 승려가 당나라로 가서 승려 일행(一行)에게 풍수지리를 배우고 돌아와 비기(秘記)를 지어 후세에 전하였다. 김위제가 도선의 술법을 공부한 후, 남경 천도를 청하며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도선기』에는 ‘고려 땅에 세 곳의 수도가 있으니, 송악(松嶽)이 중경(中京), 목멱양(木覓壤)남경(南京), 평양이 서경이다. 11⋅12⋅1⋅2월은 중경에서, 3~6월은 남경에서, 7~10월은 서경에서 지내면 36개국이 와서 조공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또 ‘나라를 세운 지 160여 년 후에 목멱양에 도읍한다’고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이 바로 새 수도를 돌아보시고 그곳으로 옮기실 때라고 봅니다.

제가 또 도선의 『답산가(踏山歌)』를 보니 ‘송악이 쇠락한 뒤에 어느 곳으로 갈 것인가? 삼동(三冬)의 해 뜨는 곳에 넓은 벌판이 있으니 후대의 어진 사람이 이곳에 도읍하면 한강의 어룡(魚龍)이 사해로 통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삼동에 해 돋는 곳이란 것은 11월 동짓날에 해 돋는 곳, 즉 동남쪽이며, 목멱산이 송경(松京)의 동남쪽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중략)…… 그러므로 한강의 북쪽에 도읍하면 왕업이 오래 이어질 것이며 온 천하가 조회하러 모여들어 왕족이 크게 번성할 것이니 실로 대명당(大明堂)의 터입니다.

……(중략)…… 또 『신지비사(神誌秘詞) 』에 이르기를 ‘저울로 비유하자면, 저울대는 부소(扶疎)이며 저울추는 오덕(五德)을 갖춘 땅, 저울접시는 백아강(百牙岡)이다. 이 세 곳에 도읍하면 70개 나라의 조공하여 올 것이고 그 지덕에 힘입어 신성한 기운을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 저울의 머리와 꼬리를 정밀히 하여 수평을 잘 잡으면 나라가 흥하고 태평성대를 보장받을 것이요, 알려준 세 곳에 도읍하지 않는다면 왕업이 쇠퇴하리라’ 하였습니다.

이는 저울을 가지고 3경을 비유한 것입니다. 저울 접시는 머리요 저울추는 꼬리이며 저울대는 균형을 잡는 곳입니다. 송악을 부소라고 하여 저울대에 비유했으며, 서경은 백아강이라고 하여 저울머리에 비유하고, 삼각산의 남쪽은 오덕을 갖춘 곳으로 저울추에 비유한 것입니다. 오덕(五德)이란 중앙에 면악(面嶽)이 둥근 형태로 토덕(土德), 북쪽의 감악(紺嶽)이 굽은 형태로 수덕(水德), 남쪽의 관악(冠嶽)이 뾰족뾰족한 형태로 화덕(火德), 동쪽의 양주(楊州) 남행산(南行山)은 곧은 형태로 목덕(木德), 서쪽의 수주(樹州) 북악(北嶽)이 네모진 형태로 금덕(金德)을 상징한 것이니, 이 역시 도선3경의 뜻에 부합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에는 중경서경은 있으나 남경이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삼각산 남쪽, 목면산 북쪽의 평지에 도성을 건설하고 때를 맞추어 순행하시고 머무시기 바랍니다. 이 문제는 진실로 나라의 흥망과 성쇠에 관련되는 일이기 때문에 신은 감히 배척 받을 것을 무릅쓰고 삼가 기록하여 올립니다”라고 하였다.

당시 일자(日者) 문상(文象)이 김위제의 의견에 찬동하였고, 또 예종 때 은원중(殷元中)도 도선의 설을 인용해 글을 올려 같은 주장을 폈다.

『고려사』권122, 「열전」35 [방기] 김위제

金謂磾, 肅宗元年爲衛尉丞同正. 新羅末, 有僧道詵, 入唐學一行地理之法而還, 作秘記以傳. 謂磾學其術, 上書請遷都南京曰.

道詵記云, 高麗之地有三京, 松嶽爲中京, 木覓壤爲南京, 平壤爲西京. 十一⋅十二⋅正⋅二月住中京, 三⋅四⋅五⋅六月住南京, 七⋅八⋅九⋅十月住西京, 則三十六國朝天. 又云, 開國後百六十餘年, 都木覓壤. 臣謂今時, 正是巡駐新京之期.

臣又竊觀道詵踏山歌曰, 松城落後向何處. 三冬日出有平壤, 後代賢士開大井, 漢江魚龍四海通. 三冬日出者, 仲冬節日出巽方, 木覓在松京東南, 故云然也. ……(中略)…… 故漢江之陽, 基業長遠, 四海朝來, 王族昌盛, 實爲大明堂之地也. ……(中略)……

又神誌秘詞曰, 如秤⋅錘⋅極器, 秤幹扶疎, 樑錘者五德地, 極器百牙岡. 朝降七十國, 賴德護神. 精首尾, 均平位, 興邦保太平, 若廢三諭地, 王業有衰傾.

此以秤諭三京也. 極器者首也, 錘者尾也, 秤幹者提綱之處也. 松嶽爲扶疎, 以諭秤幹, 西京爲白牙岡, 以諭秤首, 三角山南爲五德丘, 以諭秤錘. 五德者, 中有面嶽爲圓形, 土德也, 北有紺嶽爲曲形, 水德也, 南有冠嶽尖銳, 火德也, 東有楊州南行山直形, 木德也, 西有樹州北嶽方形, 金德也. 此亦合於道詵三京之意也. 今國家有中京⋅西京, 而南京闕焉. 伏望, 於三角山南⋅木覓北平, 建立都城, 以時巡駐. 此實關社稷興衰, 臣干冒忌諱, 謹錄申奏.

於是, 日者文象, 從而和之. 睿宗時, 殷元中亦以道詵說, 上書言之.

『高麗史』卷122, 「列傳」35 [方技] 金謂磾

이 사료는 숙종(肅宗, 재위 1095~1105) 때 음양가 관료였던 김위제(金謂磾, ?~?)가 풍수지리설을 근거로 남경 건설을 건의하는 내용이다. 여기에서 그는 풍수지리의 대가인 도선(道詵, 827~898)의 『도선답산가(道詵踏山歌)』와 『삼각산 명당기(三角山明堂記)』, 『신지비사(神誌秘詞)』를 인용해 송도(개경)의 지기(地氣)가 쇠하였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3경을 저울에 비기어 개경서경과 함께 남경을 두어야 평형이 이루어져 국가가 번영을 누릴 수 있으므로 새로이 남경을 세우고 왕이 직접 순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의 주장은 1104년(숙종 9년)에 남경 건설이 시작되면서 실현되는데, 이것은 당시 풍수지리설이 천도론의 이론적 배경이 될 만큼 널리 성행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풍수지리설은 음양과 오행을 기반으로 지기(地氣), 즉 땅의 기운에 따라 국가나 인간의 길흉화복이 영향을 받는다는 이론이다. 풍수지리설은 신라 말 혼란기에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어 지방 호족과 민간에 널리 유포되었고, 여기에 장차 닥쳐 올 길흉과 화복을 예언하거나 암시 혹은 약속하는 신비적⋅미신적 성격의 도참사상이 결부되면서 이후 정치⋅사회⋅사상 일반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풍수지리설을 확립⋅확산시킨 것은 신라 말 승려인 도선이다.

태조 왕건(王建, 877~943)도선의 풍수지리설을 이용해 각 지방의 호족과 일반 백성의 민심을 수습했으며, 고려 개국의 이념적⋅실제적 바탕을 마련하였다. 또 태조는은 ‘훈요십조(訓要十條)’를 통해 후대 왕들에게 도선의 풍수지리설을 구체화하여 유훈(遺訓)으로 남겼다. 이렇듯 도선에게 부여된 권위와 태조의 유훈이 결합하면서 풍수지리, 정확하게는 풍수도참 사상은 고려 전 기간에 걸쳐 큰 위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특히 고려 시대에는 어느 시대보다 천도 논의가 많았는데, 이러한 논의에는 반드시 풍수도참설이 결부되어 있었다. 이 사료에 나타난 숙종 대의 남경 천도 논의도 그러한 예 중 하나이다.

남경에 대한 천도 논의가 처음 등장한 것은 문종(文宗, 재위 1046~1083) 대였다. 문종은 『도선기(道詵記)』⋅『삼각산 명당기』에 기록된 삼각산 아래 지역이 제왕(帝王)의 도읍이 될 만하다는 내용의 풍수도참설을 바탕으로 1067년(문종 21년) 지금의 서울인 양주에 남경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남경은 몇 년 뒤에 폐지되었으며, 1096년(숙종 1년) 음양관으로 있던 김위제의 상소를 계기로 1104년(숙종 9년)에 다시 설치되었다. 김위제는 당시 대부분의 술사들이 그러하듯 도선의 권위를 빌려 자신의 주장에 정당성을 확보하였다. 그는 도선의 술법을 공부했다고 하며, 주로 도선의 예언서들을 바탕으로 주장을 전개하고 있다. 그는 『삼각산 명당기』⋅『도선답산가』⋅『신지비사』 등의 예언서를 인용해 지덕이 성한 곳에 남경을 건설하고 왕이 수시로 순행하면서 머무를 것을 주장했다. 그 논리는 땅의 기운(地氣)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쇠하고 또다시 일정 기간이 지나면 다시 살아난다는 ‘지덕 쇠왕설’과 땅의 기운을 국가적 차원에서 적절히 조절 통제함으로서 국가 번영을 도모하려는 ‘비보설’에 입각한 것이다. 이는 도선의 사상이자 태조 이래 이어져 온 고려 풍수사상의 전형적인 논리 구조였다.

한편 김위제의 풍수 논의 중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신지비사』의 저울 이론이다. 이는 3경을 저울에 비유하여 개경을 저울대로 삼아 중심에 두고, 남경을 저울추로 삼고 서경을 저울 접시로 삼는 것으로, 이와 같이 3경을 설치하여 지덕을 잘 관리하는 것이 왕업을 연장시키는 방편임을 강조하면서, 개경의 운수가 다하고 나서 도읍할 곳이 양주 지역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결국 개경서경남경 중심의 국토 개편안으로, 주장의 핵심은 남경이 아직 개발되지 않았으니 도성을 건립하여 순주(順走)하라는 것이다. 당시 남경이 해주와 함께 개경의 배후 도시로서 성장한 한편, 개경 관료 집단의 시지(柴地) 분급지로 꾸준하게 개발이 진행된 결과 남경의 정치⋅사회⋅경제적 비중이 확대되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김위제의 논리에는 도선의 국토 재계획 성격을 지닌 풍수지리설이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남경의 설치는 김위제의 상소가 있고 3년 만인 1099년(숙종 4년)에 재논의되어 1101년(숙종 6년) 남경개창도감(南京開創都監)이 설치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숙종은 최사추(崔思諏, 1034~1115)⋅윤관(尹瓘, ?~1111) 등을 양주로 보내 궁궐터를 살펴보게 한 뒤 공사를 시작하여 1104년(숙종 9년) 5월 남경 궁궐을 완성하였으며, 남경에 친행하며 천도의 의지를 보이기도 했지만 1105년(숙종 10년)에 죽음으로써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숙종남경 천도 추진은 단순히 풍수도참설에 의한 것만은 아니었다. 숙종개경을 중심으로 한 문벌 귀족을 억누르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남경으로의 천도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12세기에 접어들면서 지배층 내부에서 갈등과 대립이 점차 노골화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숙종은 이자의(李資義, ?~1095)의 반란을 제압하고 조카 헌종(獻宗, 재위 1094~1095)으로부터 양위를 받은 탓에 일부 대신들로부터 왕위의 정당성에 대한 의구심을 받아 왔다. 이는 1096년(숙종 1년) 중서성의 상소에 잘 드러나 있는데, 고려 국정의 중심축을 이루던 최사추, 김상기, 유석 등 중서성의 재신들은 계속된 기상재해를 하늘의 경계로 여기면서 이는 숙종의 즉위 과정에서 무고하게 살육된 자들이 많은 탓이라고 비판하였다. 이들 대신들은 중서성 상소를 통해서, 기상재해를 빌미로 숙종의 비정상적인 왕위 계승과 즉위 초반의 국정 운영을 간접적으로 비판하였다. 이즈음 김위제가 풍수도참설에 입각하여 남경의 건설을 건의했는데, 이는 숙종이 처한 정치적 위기를 벗어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숙종남경 길지설을 명분으로 내세워 남경 건설을 추진함으로써, 계속되는 기상이변과 자연재해를 자신의 비정상적인 왕위 계승 탓으로 돌리려는 비판적 시각을 피하면서, 아울러 민심의 동요를 막고자 하였던 것이다.

김위제의 상소로 시작된 숙종남경 천도 계획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남경 개발과 그 지리적 중요성은 강화되어 고려 말 천도 논의에서 계속적으로 언급되었고, 결국 조선 시대 한양 천도로 이어졌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한국 중세사회에 있어 풍수⋅도참사상의 전개과정」,『한국중세사연구』21,김기덕,한국중세사학회,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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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남경지역의 개발과 경기제」,『서울역사박물관 연구논문집』1,박종기,서울역사박물관,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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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선의 생애와 나말여초의 풍수지리설」,『한국사연구』11,최병헌,한국사연구회,1975.
편저
「풍수지리설」, 이용범, 국사편찬위원회, 1975.

관련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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