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흥군 신륵사대장각기
판삼사사(判三司事) 한산(韓山) 목은선생(牧隱先生)
2) 7월 초 3일에 나의 조부 정읍부군(井邑府君)
2) 10월 2일에 할머니께서 병으로 돌아가시자 선군께서는 예를 다하여 장례를 치르고 승려를 청해 시골의 절에서 불경을 읽었다. 선군께서 매번 탄식하시기를 ‘나는 이제부터 어디에 의지할 것인가 어디에 의지할 것인가’ 하셨는데, 좌올남산총공(坐兀南山聰公)
이색(李穡, 1328~1396)
이 이숭인(1347~1392)에게 명하여 말하기를, “대덕(大德) 경술년(1310, 충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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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성(李自成,)
께서 병으로 돌아가셨다. 선군(先君)
돌아가신 아버님. 여기서는 가정(稼亭) 이곡(李穀, 1298~1351)을 가리킴
이신 가정문효공(稼亭文孝公)께서 당시 13세셨지만 초상과 장례를 잘 치르셨다. 지정(至正) 경인년(1350, 충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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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옹(懶翁, 1320~1376)
이 선군께 말하기를 ‘공이 지금 진실로 우리 불법으로써 돌아가신 부모님의 명복을 빌고자 한다면, 어찌 장교(藏敎) 한 부를 간행하지 않으십니까. 우리 불법의 모든 것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였다. 선군께서는 즉시 부처의 초상을 향하여 서원(誓願)을 세웠다. ……(중략)……” 이숭인이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곧 기문을 써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처의 도(道)가 청정(淸淨)하고 고묘(高妙)하여 한 점의 티끌도 묻지 않고 만물에 초연하게 뛰어났으므로, 현자와 지자들은 본래부터 이를 즐거워하였다. 그 말에는 또 이른바 복전이익(福田利益)
곡식을 심으면 몇 배의 수확을 얻는 것처럼 부처를 공양하면 복을 받는다는 설
이라는 설(說)이 있으니, 충신이나 효자로서 임금이나 어버이의 은혜를 갚으려는 자라면 그 극진한 방법을 쓰지 않는 자가 없기 때문에 귀의(歸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불서(佛書)가 세상에 크게 전파되는 것은 당연하다. 가정(稼亭) 선생께서 이미 일으키시고 목은 선생께서 계승하셔서 마침내 이 법보(法寶)를 이루었다. 임금과 어버이에게 복(福)을 받드는 이것이 곧 충신과 효자가 임금이나 어버이를 위하여 극진함을 다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 누가 신하가 아니며, 아들이 아니겠는가. 지금으로부터 천만세에 이르기까지, 그 하늘같이 존경하는 분에 대하여 사모하고 발원(發願)하려는 자는 반드시 여기에서 얻을 수 있을 것임을 의심치 않으니, 내가 감히 즐겁게 글을 쓰지 않겠는가.사중(四衆)
불문(佛門)의 네 제자(弟子)인 비구(比丘)⋅비구니(比丘尼)⋅우바새⋅우바니의 통칭
중 재물을 바쳐 힘을 보탠 자에 대해서는 그의 성명을 모두 비석의 뒷면에 적어 둔다.”『동문선』권76 「기」 여흥군 신륵사 대장각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