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3년 3월) 갑인일 (충선)왕이 맏아들 강릉대군(江陵大君) 왕도(王燾, 1294~1339)를 데리고 원나라 황제를 찾아가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줄 것을 청하자, 황제가 왕도를 왕에 책봉하였다. 당시 원나라 조정에서 왕을 고려로 돌려보내려 했는데 이를 회피할 구실이 없어 맏아들에게 왕위를 물려 준 것이었다. 또 조카 연안군 왕호(王暠)를 세자로 삼았다. 왕이 일찍이 심왕(瀋王)으로 책봉 받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에게 심왕이라고 불렸다.
충숙왕
1년(1314)에 황제가 왕을 원나라 수도에 머물도록 명을 내리니 왕이 연경(燕京)
을 짓고 당시의 저명한 학자들인 염복(閻復, 1236~1312)⋅요수(姚燧, 1239~1314)⋅조맹부(趙孟頫, 1254~1322)⋅우집(虞集, 1272~1348) 등을 초청하여 교유하며 학문을 연구하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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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
에 있는 사택 안에 만권당(萬卷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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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선비족(鮮卑族)의 어떤 승려가 원나라 황제에게 건의하기를 “제사(帝師) 파스파[八思巴, 1235~1280]는 몽골 글자를 창조하여 국가에 이익을 주었으니 온 나라에 사당을 지어 공자(孔子)와 대등하게 대우하여야 한다”라고 하였다. 원나라 황제가 대신과 원로들에게 논의하게 했는데, 국공(國公) 양안보(楊安普)가 그 의견에 강력히 찬성하였다. 왕이 양안보에게 말하기를 “파스파가 문자를 만들어 국가에 공이 있다면 옛 법에 따라 제사 지내면 될 일이지, 어찌 반드시 공자에 견주어야 하겠는가? 공자는 모든 제왕의 스승이니 그를 널리 제향하는 까닭은 덕이 있기 때문이지 공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후세에 이론(異論)이 있을까 두렵다”라고 하였다. 이 의견이 비록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듣는 사람들은 모두 옳다고 여겼다.
왕이 일찍이 과거 제도를 마련할 것을 요수(姚燧)
를 시행했는데, 그 근원은 왕에게서 나온 것이다.
1238~ 1313. 낙양 출신의 원나라 학자로, 충선왕
과 교류함
의 말로써 황제에게 건의하였더니 황제가 허락하였다. 이맹(李孟)이 평장사(平章事)가 되자 주청하여 과거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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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승상 독로(禿魯)가 파면되었을 때 황제가 왕을 승상으로 임명하려 하였으나 왕이 굳이 사양하여 말하기를 “신은 폐하께서 맡기신 작은 나라의 번신(藩臣) 자리도 감당하지 못하여 왕위를 아들에게 넘기게 해달라고 간청하였고 이를 폐하께서 허락하셨는데, 하물며 큰 나라의 승상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어찌 감히 영화를 탐하여 폐하의 영명하심에 누를 끼치겠습니까? 감히 죽기를 각오하고 사양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황제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짐은 진실로 그대가 매우 선하고 권력을 피한다는 것을 알겠노라”라고 하였다.
『고려사』권34, 「세가」34 충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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