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화사(安和寺). 왕부의 동북 쪽을 거쳐 산길을 3∼4리 가면 점차로 숲 그늘이 맑고 무성해지고 늪과 산기슭은 험하디 험해진다.관도(官道)
의 글씨이다. 문의 서쪽에 정자가 있는데 방(榜)이 ‘냉천(冷泉)’으로 되어 있다. 또 좀 북쪽으로 가면 자취문(紫翠門)으로 들어가고, 다음에는 신호문(神護門)으로 들어간다. 문 동쪽 월랑
관청에서 관리하는 큰 길
의 남쪽 옥륜사(玉輪寺)에서 수십 보를 가면 작은 길이 구불구불 이어져 있고 높은 소나무가 길을 끼고 있는데, 삼엄하기가 만 자루의 창을 세워 놓은 듯하다. ……(중략)…… 다시 깊은 골짜기 속으로 들어가서 산문각(山門閣)을 지나 시냇물을 끼고 몇 리를 가면 안화문(安和門)으로 들어가고, 다음에 정국안화사로 들어간다. 절의 액호(額號)
출입문 위에 다는 편액
는 곧 지금의 태사(太師) 채경(蔡京, 1047~1126)1)
1)
채경(蔡京)은 북송(北宋) 말의 정치가로 16년간 재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금(金)나라와 연합하여 숙적인 요(遼)나라를 멸망시키는 공을 세웠다. 그러나 휘종(徽宗, 1082~1135, 재위 1100~1125)에게 아첨하고 사치하도록 이끌었으며, 구법당(舊法黨)을 탄압하였다. 결국 금나라 군대가 침입하면서 휘종이 사로잡히고 흠종(欽宗, 1100~1161, 재위 1126~1127)이 즉위하자 유배되어, 유배지로 가던 도중 병사하였다. 그는 문인이자 서예가로서 필법이 뛰어난 수준에 이르렀다. 1118년(예종
13) 4월 예종
이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수리가 끝난 안화사(安和寺)에 걸 편액을 구하였다. 이에 송나라 황제는 채경에게 ‘정국안화지사(靖國安和之寺)’란 액호를 쓰게 하여 고려로 보냈다.
'예종' 관련자료
'예종' 관련자료
문 옆에 있는 행랑 혹은 행각
에 상(像)이 있는데, 제석(帝釋)이다. 서쪽 월랑의 대청을 ‘향적(香積)’이라 하며, 가운데에는 무량수전(無量壽殿)이 세워져 있다. 그 곁에 두 개의 누각이 있는데 동쪽의 것을 ‘양화(陽和)’라 하고 서쪽의 것을 ‘중화(重華)’라 한다. 이곳 뒤에는 문이 세 개 늘어서 있다. 동쪽 것을 ‘신한(神翰)’이라 하며, 그 뒤에 전각이 있는데 ‘능인(能仁)’이라고 한다. 전각의 두 액자는 실로 금상 황제
휘종
께서 내린 어서(御書)이다. 중문은 ‘선법(善法)’이라 하는데 그 뒤에 선법당(善法堂)이 있고, 서문은 ‘효사(孝思)’라 한다. 뜰 뒤에 전각이 있는데, ‘미타당(彌陀堂)’이라고 한다. 전각 사이에 두 곁채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관음(觀音)을 봉안하였고 또 하나는 약사(藥師)를 봉안하였다. 동쪽 월랑에는 조사상(祖師像)이 그려져 있고 서쪽 월랑에는 지장왕(地藏王)이 그려져 있다. 나머지는 승려의 거실이다.『고려도경
'고려도경' 관련자료
삼가 『대비다라니신주경(大悲陁羅尼神呪經)』을 살펴보니, 이에 이르기를, “만약 환란이 바야흐로 일어나거나, 원적(怨敵)이 침범하거나, 전염병이 유행하거나, 귀마(鬼魔)가 설쳐 어지럽히는 일이 있거든, 마땅히 관세음보살의 불상을 만들어 모두가 지극히 공경하는 마음을 기울여라.당번(幢幡)
상징적 문양으로 장식된 절에 걸어 놓는 깃발
과 개(蓋)
불상 등을 덮는 불교 용품
로 장엄하게 하고 향과 꽃으로 공양하라. 그렇게 하면 적들이 죄다 스스로 항복하여 모든 환란이 아주 소멸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유언(遺言)을 받들자 마치 친히 가르치는 말씀을 듣는 것 같았습니다. 이에 단청(丹靑)의 손을 빌려서 수월관음(水月觀音)
바다에 뜬 연꽃에 서 있는 관음
의 얼굴을 모사합니다. 아! 그림 그리는 공인이 우리 백의(白衣)
희고 투명한 옷을 입은 백의관음
의 모양을 비슷하게 한지라, 지극한 정성을 다 피력하여 우러러 연모(蓮眸)
불화를 그린 뒤 마지막으로 그리는 부처나 보살의 눈동자
를 그립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빨리 큰 음덕을 내리시고 이내 묘한 위력을 더하셔서, 지극히 인자하면서 무서운 광대천(廣大天)
광대천면아수라안구반다왕(廣大天面阿修羅眼鳩槃茶王). 사천왕 중 남방을 지키는 증장천왕 휘하의 여러 신장 중 하나
처럼 적의 무리를 통틀어 무찌르게 하십시오.무외 신통(無畏神通)
악을 두려워하지 않고 물리치는 부처의 신통력
으로써 그 나머지는 저절로 물러나 옛 소굴로 돌아가게 하옵소서. 휴상인(休上人)은 사중은(四重恩)
불교 용어의 하나로, 부모(父母)와 중생(衆生), 국왕(國王)과 삼보(三寶)인 불(佛)⋅법(法)⋅승(僧)의 네 가지 은혜
을 갚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닦는 데 있어서도 나름대로의 원칙을 지니고 있었다. 또 그는 부처의 형상이나 부처의 말씀 모두가 불도(佛道)에 들어가는데 특히 중요한 바탕이 된다고 하여, 제자인 도우(道于)와 달원(達元)으로 하여금 지묵(紙墨)을 시주받아서 주해(註解)가 붙어 있는 『화엄경(華嚴經)』과 『법화경(法華經)』을 각각 1부씩 찍도록 하였다. 또 설법(說法)을 통해서 얻은 보시(布施)를 가지고는 서방 정토의 아미타불과 팔대 보살(八大菩薩)
불교에서 불법을 수호하고 중생을 보호한 여덟 보살. 관세음(觀世音)⋅미륵(彌勒)⋅허공장(虛空藏)⋅보현(普賢)⋅금강수(金剛手)⋅묘길상(妙吉祥)⋅제개장(除蓋障)⋅지장(地藏)을 뜻함
을 그려 장명등(長明燈) 아래에 안치하였다. 남은 비용은 불경을 찍는 데 보태도록 했다.『목은문고』권8, 서 증휴상인서
- 채경(蔡京)은 북송(北宋) 말의 정치가로 16년간 재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금(金)나라와 연합하여 숙적인 요(遼)나라를 멸망시키는 공을 세웠다. 그러나 휘종(徽宗, 1082~1135, 재위 1100~1125)에게 아첨하고 사치하도록 이끌었으며, 구법당(舊法黨)을 탄압하였다. 결국 금나라 군대가 침입하면서 휘종이 사로잡히고 흠종(欽宗, 1100~1161, 재위 1126~1127)이 즉위하자 유배되어, 유배지로 가던 도중 병사하였다. 그는 문인이자 서예가로서 필법이 뛰어난 수준에 이르렀다. 1118년(예종
'예종' 관련자료'예종' 관련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