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고려 시대문화역사서의 편찬과 역사관

일연의 삼국유사 집필 동기

첫머리에 말한다. 대체로 옛 성인들은 예악으로 나라를 일으키고 인의로 가르침을 베푸는 데 있어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왕이 장차 일어날 때는 부명(符命)을 받고 도록(圖籙)을 얻어 반드시 보통 사람과는 다른 점이 있으니, 그런 뒤에야 능히 큰 변화를 타서 제왕의 지위를 얻고 대업을 이루었다.

그런 까닭으로 황하에서 그림이 나오고1) 낙수(洛水)에서 글이 나옴2)으로써 성인이 나왔으며, 무지개가 신모(神母)를 에워싸서 복희(伏羲氏)3)가 탄생하였고, 용이 소전(少典)의 왕비인 여등(女登)과 교감하여 염제(炎帝)4)를 낳았으며, 황아(皇娥)가 궁상(窮桑)이란 들에서 놀다가 백제(白帝)의 아들이라 칭하는 한 신동(神童)과 통하여 소호(少昊)5)를 낳았고, 간적(簡狄)6)은 알을 삼켜 설(契)을 낳았으며, 강원(姜嫄)은 거인의 발자국을 밟아 기(弃)7)를 낳았고, 요(堯)는 잉태한 지 14개월 만에 태어났으며, 패왕8)은 용과 큰 못에서 교접하여 태어났던 것이다. 그 이후에도 이와 같은 일이 너무 많으니 어찌 다 기록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삼국의 시조들이 모두 신기한 일로 탄생했음이 어찌 괴이하겠는가. 이것이 책 첫머리에 기이편(紀異篇)이 실린 까닭이며, 그 의도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삼국유사』권1, 「기이」1 서

1)복희씨(伏羲氏) 때 황하에서 커다란 용마(龍馬)가 등에 지고 나온 그림을 의미하는 것으로, 『주역(周易)』8괘의 근원이 되었다.
2)우왕(禹王)이 물을 다스릴 때에, 낙수(洛水)에서 나온 거북의 등에 있었다는 글로, 『서경(書經)』의 홍범구주(洪範九疇)의 기원이 되었다.
3)중국 상고시대 제왕으로 삼황(三皇) 중 으뜸가는 인물이다. 백성에게 어렵, 농경, 목축을 가르쳤으며 처음으로 8괘를 만들었다고 한다.
4)중국 상고 시대 제왕인 신농(神農)을 말한다. 백성에게 농업, 의료, 교역 등의 방법을 가르쳤다고 한다.
5)중국 상고시대 제왕으로 황제의 아들이며, 이름은 현효(玄囂), 호는 금천(金天氏)이다. 소호금천(少昊金天),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라고도 불린다.
6)중국 상고시대 유융씨(有娀氏)의 장녀로서 후에 제곡(帝嚳)의 비(妃)이다. 일찍이 현구(玄丘)의 물에서 목욕하다가 제비가 떨어뜨린 알을 얻었는데 잘못 삼켜 임신하여 설(契)을 낳았다고 한다.
7)주나라의 시조 후직(后稷)의 이름이다. 그의 어머니 강원이 거인의 발자취를 밟고 임신하여 아이를 낳았으므로, 상스럽지 못한 일로 보아 아이를 버리려고 하여 이름을 기(弃)라 하였다고 전한다.
8)한 고조(高祖) 유방(劉邦)을 가리키는 말로, 고조가 패(沛)땅에서 군사를 일으켰으므로 이렇게 불렀다.

叙曰. 大抵古之聖人, 方其禮樂興邦, 仁義設敎, 則怪力亂神, 在所不語. 然而帝王之將興也, 膺符命受圖籙, 必有以異於人者, 然後能乗大變, 握大噐, 成大業也.

故河出圖洛出書而聖人作, 以至虹繞神母而誕羲, 龍感女登而注炎, 皇娥遊窮桑之野, 有神童自稱白帝子, 交通而生小昊, 簡狄呑卵而生契, 姜嫄履跡而生弃, 胎孕十四月而生堯, 龍交大澤而生沛公. 自此而降, 豈可殫記.

然則三國之始祖, 皆發乎神異, 何足怪㦲. 此紀異之所以漸諸篇也, 意在斯焉.

『三國遺事』卷1, 「紀異」1 序

이 사료는 일연(一然, 1206~1289)의『삼국유사』 기이편(紀異篇) 서문이다. 『삼국유사』에는 지은이 일연의 서문이 따로 전하지 않기 때문에, 기이편 앞에 붙은 ‘머리말[敍曰]’이 『삼국유사』 전체를 통틀어 일연의 목소리가 개입한 유일한 부분이다. 일연은 여기서 제왕의 탄생과 관련해 ‘괴력난신’의 이야기가 있어 왔음을 중국의 사례를 들어 말하면서, 우리 삼국 시조가 모두 신비스러운 일로 탄생했다는 것도 전혀 괴이하지 않은 것이라 역설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것이 첫머리에 ‘기이편’을 싣는 까닭임을 밝히며 『삼국유사』의 편찬 의도와 사관을 뚜렷이 하고 있다.

일연경주속현장산군(章山郡)에서 1206년(희종 2년) 아버지 김언정(金彦鼎)과 어머니 이씨(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견명(見明)이었는데 뒤에 일연으로 바꾸었다. 9세에 무량사(無量寺)에 들어가 공부하였으며, 14세에 설악산 진전사(陳田社)로 출가하여 대웅장로(大雄長老)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선종 가지산문(迦智山門)과 인연을 맺었다. 그 뒤 그는 여러 선문을 방문하여 수행하면서 22세 이전에 이미 이름이 알려져 선종 9산문(九山門) 사선(四禪)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1227년(고종 14년) 승과에 합격한 후 대몽 항쟁기인 20여 년간을 주로 수행에 정진했고, 최씨 정권이 몰락하고 강화도 정부가 몽골에 항복한 후인 1261년(원종 2년)에 왕명으로 강화에 초청되어 선월사(禪月社)에서 활동하였다. 이후 경상도의 여러 사찰에서 주석하고 가지산문의 재건에 힘을 쏟았다. 1268년(원종 9년)에는 왕명으로 운해사(雲海寺)에서 교⋅선종의 명승을 모아 놓고 대장낙성회향법회(大藏落成廻向法會)를 주관하여 불교계 최고 승려로 자리 잡았다. 72세인 1277년(충렬왕 3년)에 왕명에 따라 운문사(雲門寺)에 주석하였다가 1283년(충렬왕 9년)국존(國尊)에 책봉되었으며, 1289년(충렬왕 15년) 인각사(麟角寺)에서 입적하였다.

삼국유사』는 일연이 만년인 1281년(충렬왕 7년) 즈음 완성한 역사책으로 당시의 시대 상황이 반영되어 있다. 당시 일연은 왕권과 밀착하여 승려로서는 최고의 영예를 누렸지만, 고려가 원에 완전히 예속되어 원의 문화가 널리 퍼지고 또한 원의 일본 정벌로 인한 부담으로 사회가 피폐해진 시기였다. 하지만 그가 속한 가지산문은 보수적 정치 세력의 지원을 받고 있었기에 원 지배하의 고려 사회 모순이나 만연한 불교계의 타락을 극복하기 위한 사상적 기능을 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일연의 『삼국유사』 편찬은 바로 이러한 국가적 상황과 그러한 상황에 대처하지 못하는 자신과 가지산문의 시대적 상황과 이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되었다. 이 때문에 그는 『삼국유사』를 통해 민족적 자주정신과 불교에 의한 민중 구원을 강조하였다.

삼국유사』의 전체 분량은 5권으로 왕력(王曆)⋅기이(紀異)⋅흥법(興法)⋅탑상(塔像)⋅의해(義解)⋅신주(神呪)⋅감통(感通)⋅피은(避隱)⋅효선(孝善)등 9편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왕력은 제왕의 일대기이며, 기이는 신이사(神異史)를 적은 것이고, 흥법 이하의 7편은 불교에 관한 내용으로 역시 신이사를 중심으로 하여 엮었다. 특히 기이편은 여러 편목 중에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전체 서문이 없는 『삼국유사』에서 유일하게 서문을 갖추고 있다. 이는 전체 편목 중 기이편을 강조하고자 한 저자의 의도로 볼 수 있는데, 기이편의 서문인 ‘서(敍)’에서 그 편찬 의도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그는 우선 논어에서 공자가 ‘괴력난신’을 말하지 않는다고 한 점을 비판하였다. 괴력난신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초인간적 힘에 의한 역사의 발원을 믿지 않는 반면 인간의 도덕적 행실에 의하여 국가의 흥망이 좌우된다고 믿는 것으로, 공자의 입장이자 유교의 입장으로 볼 수 있다. 일연은 중국 제왕들의 예를 열거하며 제왕의 탄생이나 국가의 흥망에 초인간적인 힘이 작용했음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유교적 사관에 대한 비판이자, 자신들의 역사에서는 제왕의 출현과 관련해 신이함의 정당성을 인정하면서도 주변국에 대해서는 그 경우를 괴력난신으로 취급하여 부정하는 중화주의와 이를 추종하는 사대적 역사관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였다. 즉, 일연은 중국 제왕들의 신이를 믿는다면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시조가 신이한 데서 나왔다는 것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며, 이를 강조하기 위해 기이편을 맨 처음에 싣는다고 언급하였다.

한편, 『삼국유사』를 통해 그가 신성성을 부여하고자 한 대상은 단순히 고구려⋅백제⋅신라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역사 전반을 의미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는 『삼국유사』에서 다루는 범위가 삼국에 국한되지 않고 단군조선에서부터 후백제까지의 전 역사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일연이 서문에서 밝힌 이러한 취지는 기이편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데 그 전형적인 예가 ‘고조선’조라 할 수 있다. 일연은 조선의 시작을 단군조선으로 잡아 중국의 요(堯)와 동시대로 처리했고, 단군을 천제의 손자로 설정하였다. 이는 우리나라의 위상을 중국과 나란히 둔 것이며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한 민족적 자긍심의 표현이었다. 즉, 그는 몽골과의 전쟁 후 몽골의 내정 간섭, 각종 공물 부담, 일본 원정에 고려군 동원, 몽골 문화 확산 등 민족적 자주성이 훼손된 상황에서 민족의 자긍심을 일깨우고 자주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삼국유사』를 편찬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민족적 자주의식을 강조하는 이러한 역사 인식은 일연이 새롭게 개척했다기보다는 이를 전후로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동명왕편」, 이승휴(李承休, 1224~1300)의 『제왕운기』 등이 편찬된 것으로 볼 때, 고려 후기 지식인 사이에 폭넓게 공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는 그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유사(遺事)’, 즉 잃어버린 사실 혹은 빠뜨린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즉 『삼국사기』가 유교적 합리주의 사관에 의거해 불교 및 비합리적인 신이사를 일부러 삭제하거나 수정해서 실었던 것에 대한 비판이자 보충의 의미로 편찬된 것이다. 일연은 우리 역사와 관련한 신이사를 중심으로 자료를 수집⋅편집하여 민족적 자주의식을 고취하고자 한 것이었다. 따라서 일연이 자신의 편찬 의도를 명백히 밝힌 기이편 서문은 삼국유사를 이해하는 데 가장 핵심적인 자료로 여겨지고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삼국유사에 나타난 일연의 불교사관」,『한국사연구』20,김상현,한국사연구회,1978.
「삼국유사의 종합적 연구1」,『한국민속학』29,박진태 등,한국민속학회,1997.
「삼국유사 기이편의 고찰」,『신라문화』1,이기백,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1984.
「삼국유사의 사학사적 의의」,『창작과비평』,이기백,창작과비평사,1976.
「고려후기의 역사인식과 역사서술」,『한국사론』6,정구복,국사편찬위원회,1981⋅.
「삼국유사의 사학사적 고찰」,『삼국유사의 종합적 검토』,정구복,한국정신문화연구원,1987.
「삼국유사 기이편의 저술의도와 고구려인식」,『사학지』41,차광호,단국대사학회,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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