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고려 시대문화역사서의 편찬과 역사관

성리학적 유교 사관의 대두

동국군왕개국연대 병서

삼가 국사(國史)에 의거하는 한편 각 본기와 『수이전(殊異傳)』에 실린 바를 채록하였고, 요⋅순 이래 경전과 제자, 사서를 참고하여 허황된 말을 버리고 이치에 맞는 바를 취하였다. 그 사적을 드러내고 이를 시로 읊어 흥하고 망한 연대를 밝히니 모두 1460언이다.

【지리기(地理紀)】

요동에 다른 천하가 있으니 그 땅은 중원의 왕조와 구분되어 나뉘었네. 크고도 넓은 바다 물결 삼면을 둘러쌌고 북녘으로는 대륙과 선처럼 이어졌다. 그 가운데 사방 천리가 바로 조선이라, 강산의 형승은 천하에 알려졌네. 밭 갈아 농사짓고 우물 파서 물 마심이 예의의 나라여서 화인(華人)이 이름 하길 소중화(小中華)라 했네.

【전조선기(前朝鮮紀)】

처음에 누가 나라를 열고 풍운을 아뢰었나. 석제(釋帝)의 손자 단군일세. [본기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상제 환인은 서자가 있었는데 이름이 웅이라 했다. 일러 말하길 ‘아래 세상에 내려가 삼위태백(三危太白)에 이르러 크게 인간을 이롭게 하라.’ 하였다. 웅은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받고 귀신 3천을 거느리고 태백산 마루 신단수 아래에 내려왔다. 바로 단웅천왕이라 한다. 손녀로 하여금 약을 먹여 사람의 몸이 되게 하여 단수신과 혼인하여 아들을 낳으니 단군이다. 조선의 땅에 거하면서 왕이 되었다. 그러한 까닭에 시라(尸羅)⋅고례(高禮)⋅남북옥저(南北沃沮)⋅동북부여(東北夫餘)⋅예와 맥은 모두 단군의 시대이다. 1380년을 다스렸으며 아사달 산에 들어가 신이 되었으니 죽지 않은 때문이다.”] 요제(堯帝)와 같은 무진년에 나라를 세우시고 우순(虞舜)을 지나 하(夏)나라 때까지 왕위에 계셨도다. 은나라 무정(武丁) 8년 을미년 아사달산에 들어가 신이 되었다.〔지금의 구월산이다. 일명 궁홀 또는 삼위라 한다. 사당이 지금도 있다.〕나라 다스리길 1028년이니 조화 상제인 환인의 전한 일 아니겠는가? 그 뒤 164년 만에 어진이가 나타나 군신의 의를 마련하였다. 〔어떤 본에는 “그 뒤 164년 동안 부자는 있었으나 군신은 없었네.”라 하였다.〕(중략)

제왕운기』 하, 동국군왕개국연대

〈東國君王開國年代 幷序〉

謹據國史, 旁採各本紀與夫殊異傳所載, 參諸堯舜已來經傳子史, 去浮辞, 取正理. 張其事而詠之, 以明興亡年代, 凢一千四百六十言.

〈地理紀〉

遼東別有一乾坤, 斗與中朝區以分. 洪濤萬頃圍三面, 於北有陸連如線. 中方千里是朝鮮, 江山形勝名敷天. 耕田鑿井禮義家, 華人題作小中華.

〈前朝鮮紀〉

初誰開國啓風雲. 釋帝之孫名檀君.【本紀曰. 上帝桓因有庶子, 曰雄云云. 謂曰, 下至三危太白, 弘益人間歟. 故雄受天符印三箇, 率鬼三千而降太白山頂神檀樹下, 是謂檀雄天王也云云. 令孫女飮藥, 成人身, 與檀樹神婚而生男, 名檀君. 據朝鮮之域爲王, 故尸羅高禮南北沃沮東北扶餘穢與貊, 皆檀君之壽也. 理一千三十八年, 入阿斯逹山爲神, 不死故也.】 並與帝高興戊辰, 經虞歷夏居中宸. 於殷虎丁八乙未, 入阿斯逹山爲神.【今九月山也. 一名弓忽, 又名三危祠堂猶在.】 享國一千二十八, 無奈變化傳桓因, 却後一百六十四, 仁人聊復開君臣.【一作, 爾後一百六十四, 雖有父子無君臣.】. ……(中略)……

『帝王韻紀』下, 東國君王開國年代

이 사료는 동안거사(動安居士) 이승휴(李承休, 1224~1300)가 1287년(충렬왕 13년)에 쓴 『제왕운기(帝王韻紀)』 중 『동국군왕개국연대(東國君王開國年代)』의 일부이다.

이 글을 쓴 이승휴경산부(京山府) 가리현(加利縣) 사람으로, 가리 이씨(加利李氏)의 시조가 된다. 1252년 문과에 급제했고 두 차례 서장관(書狀官)으로 원나라에 다녀왔는데, 1274년(원종 15년) 원종의 죽음을 알리는 사행 때 원나라에 가서 태자의 상복을 고려식으로 할 것을 요청하여 허락받기도 하였다. 이후 감찰어사, 우정언, 우사간 등을 지내면서 왕에게 직간을 주저하지 않는 개혁적인 태도를 유지하였다. 뒤에 전중시사(殿中侍史)에 임명되어 1280년(충렬왕 6년) 왕의 실정과 그 측근의 폐단을 10개 항목으로 간언하였다가 파직되었는데, 이에 삼척으로 돌아가 용안당(容安堂)에 은거하면서 『제왕운기』와 『내전록(內典錄)』을 저술하였다. 1298년 다시 관직이 제수되었으나 곧 밀직부사 감찰대부사림학사승지(密直副使監察大夫詞林學士承旨)로 치사하였다.

이승휴가 『제왕운기』를 저술한 배경은 당시 역사적 상황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이승휴의 생애는 무신 정권-여몽 전쟁-원 간섭기에 걸쳐 있었다. 그는 자신이 파직된 직접적인 이유를 인연과 운수가 나빠서라고 표현하고 있으나, 사실 충렬왕의 실정과 원나라에 편승한 세력의 폐해에 대한 직언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두 차례 원나라 사행을 통해 팽창하는 제국의 위력을 목격하였으며, 고려의 문화가 흡수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갖게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그는 왕권의 강화와 확립, 몽골-원에 대한 민족적 저항의식을 강렬하게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1281년(충렬왕 7년) 일연(一然, 1206~1289)이 『삼국유사』를 저술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그는 왕권의 회복과 성왕(聖王)을 중심으로 한 현신의 역할 및 간신 및 역신, 권신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강조하였다. 이는 결국 정치적 도의와 사회 윤리 회복에 대한 의지의 표명이자 자주적이고 역사적 정통을 세우고자 한 것으로, 이를 역대 제왕의 역사를 통해 제시하려 하였다.

제왕운기』 전체는 상권과 하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위의 사료는 이 중 하권 『동국군왕개국연대』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상권에는 서문(序文)에 이어 중국 역사의 흐름을 시로 읊고 있다. 즉 신화시대부터 삼황오제(三皇五帝), 하(夏)⋅은(殷)⋅주(周)의 3대와 진(秦)⋅한(漢), 수(隋)⋅당(唐), 오대(五代)와 송(宋), 거란과 금(金) 등을 거쳐 원(元)의 흥기에 이르기까지 칠언고시 264구로 읊은 것이다. 상권 마지막에는 앞의 시문과 별도로 「정통상전송(正統相傳頌)」이라 하여 중국의 역사를 정리하여 한 편의 짧막한 글로 붙였다. 하권에서는 우리나라 역사를 칠언과 오언으로 노래하였다. 『제왕운기』는 크게 『동국군왕개국연대』와 『본조군왕세계연대(本朝君王世系年代)』의 2부로 나뉜다. 『동국군왕개국연대』에서는 서(序)와 지리기(地理紀)를 두고, 이어 단군조선에 해당하는 전조선(前朝鮮), 기자조선에 해당하는 후조선(後朝鮮), 위만(衛滿)의 찬탈, 한사군 설치와 열국, 진한⋅마한⋅변한의 삼한, 신라⋅고구려⋅후고구려, 백제기⋅후백제, 발해가 고려로 이어지는 과정을 칠언고시 264구 1460언으로 읊어 정통론으로 제시하였다. 『본조군왕세계연대』는 오언고시 700언으로 지었는데, 고려 태조의 세계(世系)로부터 이승휴가 살았던 시대인 충렬왕 때까지의 왕계와 정치의 흥망성쇠를 다루었다.

제왕운기』는 『삼국유사』에서의 고조선 서술과는 몇 가지 다른 특징이 보인다. 먼저 『동국군왕개국연대』에서는 고조선 시대를 전조선-후조선으로 나눈 뒤 위만조선을 후조선에 이어 서술하였다. 다음으로 환웅에 대해 단웅천왕(檀雄天王)이라 하고 단군을 석제(釋帝)의 손자라 하고 있으며, 손녀로 하여금 약을 먹여 단수신과 결혼케 하여 단군을 낳았다고 밝히고 있다. 단군조선의 건국 시기에 대해서도 『삼국유사』에서는 요임금 즉위 50년인 경인년이라 했으나 『제왕운기』에서는 요가 나라를 세운 것과 같은 시기인 무진년이라 하여 차이가 있다. 또 단군조선의 역사에 대해서 1028년이라 보고 있으나, 『삼국유사』에서는 1500년이라 하고 있다. 다만 이러한 세부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책이 모두 단군을 국조(國祖)로 보아 한국사 체계에 명확히 편입시켰다는 점은 선구자적인 역사 서술로서 공통된 업적이다. 또한 발해를 고구려의 계승국으로 인정하고 고려 태조에게 귀순한 사실을 서술함으로써 최초로 한국사에 포함시킨 점 역시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제왕운기』에는 이승휴를 비롯한 당대 지식인의 역사의식이 잘 나타나 있다. 전조선기 앞에 둔 지리기에서는 중국과는 다른 천하로서 예의의 나라라고 하여 서두에서부터 고려 문화의 독자성을 강조하고 있다. 또 『동국군왕개국연대』와 『본조군왕세계연대』를 통해서는 동국의 독자적 역사를 전개하며 중국의 많은 왕조는 멸망했지만 고려는 그 치세가 오래되었음을 밝히고, 원나라의 정치적 간섭 속에서도 민족문화의 우월성과 역사 전통을 지켰음을 제시하였다.

한편, 그가 고려 문화의 독자성을 드러내고 있지만 결국 그 자부심의 근거는 중국인들이 조선을 소중화, 곧 문명국으로 보았다는 점에 두고 있으므로 결과적으로는 중국 중심 역사관을 벗어나지 않은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제왕운기』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평가가 내려지기도 한다. 즉, 동국 역사와 고려 왕조의 자존적(自尊的) 자부심을 드러낸 역사서라는 평가도 있지만, 이와 달리 중국의 역사를 정리하고 춘추 정통론적 유교사관을 내세움으로써 결국 사대(事大)를 합리화한 비자주적 측면도 있다는 것이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이승휴의 역사관과 역사서술」,『한국사학사학보』11,김남일,한국사학사학회,2005.
「이승휴의 『제왕운기』에 대한 연구 현황과 쟁점」,『국학연구』18,박인호,한국국학진흥원,2011.
「이승휴의 생애와 역사인식-제왕운기를 중심으로-」,『고려사의 제문제』,유경아,삼영사,1986.
「『삼국유사』「고조선」의 『고기』와 『제왕운기』「전조선기」의 『본기』가 구『삼국사』「단군본기」라는 변증」,『단군학연구』15,이강식,단군학회,2006.
「고려중기의 민족서사시」,『한국의 역사인식』상,이우성,창작과비평사,1976.
「고려후기의 역사인식과 역사찬술」,『한국사론』6,정구복,국사편찬위원회,1979.
「이승휴의 역사관」,『한국사학사학보』21,정구복,한국사학사학회,2010.

관련 사이트

한국학중앙연구원 왕실도서관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
링크연결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