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고려 시대문화귀족 문화의 발달

예종 대의 시 모임-죽림고회

예종은 천성이 학문을 좋아하고 유아(儒雅)를 숭상하여, 특별히 청연각(淸宴閣)을 열고 날마다 학사들과 함께 삼분오전(三墳五典)을 토론하였다. 일찍이 사루(莎樓)에 나아가니 앞에 목작약이 활짝 피어 있었다. 궁중에 입시한 여러 선비에게 명해 각촉(刻燭)하고 칠언육운(七言六韻)의 시를 짓게 하였는데, 동궁 요좌(僚佐) 안보린(安寶麟)이 1등이었다. 그 등급을 따라 은혜를 베푸니 더욱 두터웠다.

당시 강일용(康日用) 선생의 시명(詩名)이 천하를 움직였으므로 임금이 마음 속으로 그의 작품을 기다렸다. 강일용이 촛불이 다하려 할 즈음 겨우 1연(聮)을 짓고는 그것을 쓴 종이를 소매에 넣고 어구(御溝) 가운데 엎드리니 임금이 어린 환관에게 명하여 그것을 빨리 가져오게 하였다. 그 시에 이르길, “머리 흰 취옹(醉翁)은 전각 뒤에서 보고, 눈 밝은 유로(儒老)는 난간에 기대었도다”라고 하였다. 고사(故事)를 인용하는 정묘함이 이와 같음을 보고 임금이 감상하면서 탄식하길 “이는 옛사람이 이른바 ‘흰머리의 여인이 꽃과 비녀로 얼굴을 가득 꾸민 것이 서시(西施)가 반쪽 화장한 것만 못하다’는 것이다” 하고는 위로하고 타일러 보냈다.……(하략)……

파한집』 상

睿王天性好學, 尊尙儒雅, 特開淸宴閣, 日與學士, 討論墳典. 嘗御莎樓, 前有木芍藥盛開, 命禁署諸儒, 刻燭賦七言六韻詩, 東宮寮佐安寶麟爲之魁. 随科級恩例尤厚.

時康先生日用, 詩名動天下, 上心佇觀其作. 燭垂盡纔得一聮, 袖其紙伏御溝中, 上命小黃門遽取之. 題云, 頭白醉翁看殿後, 眼明儒老倚欄邉. 其用事精妙如此, 上歎賞不已曰, 此古人所謂, 白頭花鈿滿面, 不若西施半粧, 慰諭遣之. ……(下略)……

『破閑集』上

이 글은 고려 명종(明宗, 재위 1170~1197) 대를 중심으로 활약한 문인 이인로(李仁老, 1152~1220)의 시문집인 『파한집(破閑集)』에 실린 내용이다. 당대가 아닌 예종(睿宗, 재위 1105~1122) 대의 시문을 짓는 정경을 기록하고, 그 스스로 이를 보충하면서 시를 짓는 이치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문장을 짓는 일화이자 사례로 든 것이지만, 예종 대 학문을 장려하는 분위기 속에서 예종이 주도하는 시회(詩會)가 많아 이 시기 문학이 흥성했음을 엿볼 수 있다.

먼저 이 글을 남긴 이인로는 처음 이름은 득옥(得玉)이었으며, 호는 쌍명재(雙明齋)이다. 무신 정권기를 살았던 문인으로 문종 대부터 인종(仁宗, 재위 1122~1146) 대까지 최고의 외척 가문이던 경원 이씨(慶源李氏)의 후손이다. 정중부(鄭仲夫, 1106~1179)의 난 직후 잠시 불문에 귀의하였다가 25세에 태학에 들어갔으며, 29세인 1180년(명종 10년)에 진사과에 장원급제하였다. 문극겸(文克謙, 1122~1189)의 천거로 한림원에 들어간 이래 14년간 조칙 작성 등 글 짓는 일을 전문으로 맡았다. 그는 같은 시기의 문장가인 임춘(林椿, ?~?)⋅오세재(吳世才) 등과 어울려 시와 술을 나누고 호탕하게 즐기면서, ‘죽림고회(竹林高會)’란 모임을 만들었다. 이때 시문 비평에 대한 논의가 주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이 사료에서 무대로 하는 예종 대는 고려 시대 귀족 문화가 가장 번성했던 시기에 해당한다. 예종 시기 문학과 예술의 발전에 큰 역할을 한 곳이 왕실 도서관에 해당하는 청연각(淸讌閣)이었다. 예종은 정무에서 한가로운 때를 빌려 청연각에서 『예기(禮記)』나 『서경(書經)』, 『시경(詩經)』 등에 대한 경연과 함께 자주 연회를 베풀고 시문을 지으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때 예종은 청연각에서 송의 황제가 보내 온 서화(書畵) 등의 예물을 재추(宰樞)⋅시신(侍臣)에게 보여 주고 나눠 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청연각의 풍광과 그 즐거움에 대해 김인존(金仁存, ?~1127)은 「청연각기」를 남겨 전하였다.

강일용이 각촉부시(刻燭賦詩)한 내용을 전하는 사료는 1122년(예종 17년) 3월에 있었던 사실을 전하는 것이다. 당시 사대부들은 각촉부시를 즐겼는데, 사료는 국왕 역시 이러한 모임을 자주 열었음을 보여 준다. 국왕이 시회를 직접 즐기고 이러한 놀이를 공공연하게 벌였다는 것은 당시 문인층을 중심으로 한 시회의 번성과 귀족 문화의 심화에 따른 문학의 발전 양상을 보여 주는 부분이다.

이러한 예종 대 문학은 중화(中華)를 지향한 면이 있었다. 이는 청연각을 지어 여러 문인이 융화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든 사실에서 이미 나타나며, 실제 문인들의 글에서도 이와 관련한 분위기를 확인할 수 있다. 김인존이 남긴 「청연각기」에 “유술(儒術)을 숭상하고 화풍(華風)을 즐겨 사모하므로”라고 한 대목이나 예종에 대한 사관의 평에 “중화의 풍습을 흠모하고”라 한 것은 이에 해당한다.

한편 마지막 사료는 이 글을 남긴 이인로의 시문학론에 해당한다. 예종 대에 시 모임이 번성하는 과정에서 고려 시문은 더욱 풍성해지고 발달하였던 것이다. 이인로는 이를 시학론으로 정리하였다. 그는 마음에서 근원하는 시의 본질에 대해 논하면서 빈부와 귀천으로 대할 수 없는 것이 문장이라 하여 문학의 독자적 가치를 인식할 것을 주장하였다. 한편 시의 내용은 미적 요소와 충의의 요소가 혼합된 것이어야 한다고 하였으며, ‘어의구묘(語意俱妙)’라 하여 말과 뜻을 정묘하게 갖추고 작위가 아니라 시문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경지에 이르는 것을 중시하였다. 다른 사람의 운을 끌어다 쓸 경우 억지로 작품을 쓰게 되고, 시에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라도 원작에 미치지 못하게 된다는 말은 이러한 이인로가 말하는 시론의 특징을 보여 주는 부분이다.

이인로의 『파한집』은 최자(崔滋, 1188~1260)의 『보한집(補閑集)』과 아울러 시평(詩評)을 곁들인 우리나라 최초의 시화집이다. 각종 시화⋅문담뿐 아니라 문학과 관련한 풍속을 함께 기록하여 고려 귀족 문화의 흥성기라 불리는 예종 대 문학과 예술의 발전 양상을 알아볼 수 있는 중요한 사료라 하겠다. 이를 통해 고려의 한문학은 예종 대에 커다란 발전을 이룩하였다는 점, 그 수준은 중국의 유명 한시를 끌어 시를 짓는 용사(用事)를 하는 등 모화사상(慕華思想)에 젖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독자적인 시문학론이 도출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고려조 한문학론』,,고경식,민속원,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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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중기 시화 비평의 성립에 대하여-파한집을 중심으로-」,『한문교육연구』3,유영봉,한국한문교육학회,1989.
「고려 죽림고회의 작품세계 연구-시학 검증을 중심으로-」,『한문고전연구』19,허남욱,한국한문고전학회,2009.
저서
『고전문학사의 라이벌 : 시대와 불화한 천재들을 통해 본 고전문학사의 지평』, 정출헌, 한겨레출판사, 2006.
『한국문학통사 1⋅2』, 조동일, 지식산업사, 2005.

관련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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